2005년 7월호

‘1000期’ 맞는 대한민국 해병, 그들만의 세계

“국적 포기? 우린 재수, 3수하며 ‘빨간 명찰’ 달러 간다, 필승!”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5-07-06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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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期’ 맞는 대한민국 해병, 그들만의 세계
    “997기!”“악!”

    “997기! 목소리 그것밖에 안 나오나?”

    “아닙니다∼!”

    “천자봉 행군하느라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6월9일 오후 3시30분, 해병대 교육훈련단(단장 양수근 준장) 제1신병교육대대 연병장. 413명의 훈련병이 대대장 김영은 소령 앞에 일사불란하게 도열했다. 엄청난 인내와 체력을 요하는 까닭에 이른바 ‘극기주(克己週·일명 ‘지옥주’)’라 부르는 훈련 5주차를 맞아 이들은 해병대 신병교육의 극점(極點)으로 통하는 천자봉(원래 천자봉은 경남 진해에 있지만, 포항으로 훈련장소를 이전한 이후 포항시 영일읍의 운제산(해발 474m)을 ‘천자봉’이라 부른다) 행군을 막 마친 참이었다.

    새벽 6시에 시작된 행군은 9시간여 만에 끝났지만, 연병장의 흙먼지는 채 가라앉지 않았다. 행군 전날 배식량은 반으로 줄었고, 지난 밤새 이어진 목봉체조 등 체력단련으로 1∼2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해 몸은 말 그대로 파김치다. 게다가 수은주가 30℃까지 치솟은 무더운 날씨. 저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도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간다. 점점 무감(無感)해진다. 체중과 함께 30kg이 넘는 완전군장을 왕복 24km 행군 내내 어렵사리 지탱해준 두 무릎이 그제야 의지와 무관하게 후들거린다.

    “훈병 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훈병 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훈련교관들이 각자 맡은 소대를 돌며 훈련병의 가슴 오른쪽에 붙은 노란색 명찰 위로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 명찰을 하나씩 덧달아주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악에 받친 듯 관등성명을 외치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훈련교관이 명찰을 달아준 훈련병의 어깨를 툭 치며 던지는 딱 한마디.

    “고생했어.”

    이어 연병장에 낮게 깔리는 해병대가(歌) ‘나가자 해병대’.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정신 가슴에 안고….”

    비록 10분 남짓한 사이에 끝났지만, 빨간 명찰 수여식은 고되기로 소문난 훈련을 마침내 견뎌내고 비로소 한 명의 해병으로 인정받는 자리. 이제 남은 건 1주간의 보충교육뿐. 그런데도 감회에 젖어 눈시울을 붉히는 훈련병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안다. 5월2일 가입소해 이제 며칠 후면 수료식을 마치고 각기 배치받은 실무부대로 떠날 즈음, 6주간 동고동락한 동기들과 자신을 쉴새없이 ‘갈구던’ 훈련교관들과의 연(緣)을 되새김질하며 봇물처럼 터질 눈물을 결코 감출 수 없으리란 것을. 그것은 올해로 창설 56주년을 맞기까지 쉼없이 이어져온 해병대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8월5일 1000기 신병 탄생

    대한민국 해병대(ROK Marine Corps)가 ‘1000기(期)’ 신병을 맞는다. 공군 등 타군의 병(兵)에도 기수란 게 있지만, 해병대에서 그것은 존재의 표상(表象)과도 같다. 전원 지원자로만 구성되는 부대 특성상 1000기수를 이어왔다는 자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해병대에도 징집기수는 있었다. 전쟁 발발시 동원예비군으로 활용하기 위해 서울, 대구·경북, 인천, 제주 등 특정 지역에선 1975년부터 연간 24개 기수 중 8개 기수 병력을 무작위로 차출, 충원해왔다.

    하지만 2003년 징집제도가 완전폐지(제주도 및 도서지역 상근예비역은 예외)되면서 해병대의 모든 병력은 100% 지원자로 채워진다. 이를 두고 해병대 장병들은 “한 명의 지원자는 열 명의 징집자만한 가치가 있다”며 스스로 우수성을 뽐낸다.

    1000기 신병 모집 합격자들은 6월21일부터 해병대 교육훈련단(포항시 남구 오천읍)에서 5박6일의 가입소기간을 보낸 뒤 6월27일 6주간의 신병교육을 시작한다. 그리고 오는 8월5일 수료식을 마치고 1000기 해병으로 탄생한다.

    한국 해병대의 위상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병력 규모는 2만7000여 명(장교 2000여 명, 부사관 4300여 명, 병 2만700여 명). 해병대를 보유한 57개국 중 미국(17만4000명), 프랑스(3만3900명), 대만(3만명)에 이어 네 번째다. 북한의 경우 상륙군 운용능력 및 장비가 탁월한 해군 소속 특수부대 ‘해상저격여단’ 등 해병대 기능을 하는 병력이 7700명 선이다.

    2개 사단과 1개 여단을 갖춘 한국 해병대는 부대 규모 면에서도 3개 원정군으로 이뤄진 미국, 3개 사단급의 대만에 이어 세계 3위. 더욱이 상륙작전 수행능력은 미국·영국 다음으로 우수하다고 평가받는다.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부대 사단본부 경비를 해병대 중대급 병력이, 바그다드의 주(駐)이라크 한국대사관 경계 및 방호를 소대급이, 주(駐)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관(카불 소재) 경계 및 방호를 분대급이 맡아 언제 어떤 유형의 테러행위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파병 국가 병력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라식수술까지 하는 지원자들

    타군에 비해 훨씬 적은 병력에도 막강 전투력을 갖춘 ‘강소군(强小軍)’ 해병대. 그 인기는 가히 상한가를 달린다. 주지하듯, 해병대는 수륙양면에서 전투할 수 있도록 특별히 편성된 부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격렬하기 짝이 없는 첫 전투 신(scene)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듯, 앞에는 적, 뒤로는 바다가 버티고 있는 극한상황이 바로 해병대가 맞닥뜨려야 할 전장(戰場)이다.

    상륙작전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주요 변수. 그런데도 병력과 장비, 물자의 추가지원은 불가능하다. 상급 부대나 인접 부대, 후속 부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여건에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 일단 적 해안에 상륙하면 그야말로 배수진을 쳐야 한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되돌아올 수 없는 법. ‘광란의 사선(死線)’에서 살아남으려면 싸워 이겨야만 한다.

    그렇기에 훈련강도는 셀 수밖에 없다. 신병교육기간은 6주. 함상견학에 1주일이 소요되는 해군과 기간이 같고, 육군과 공군보다는 1주가 길다. 그런데도 매월 2회씩 연간 24개 기수를 뽑는 신병 모집엔 지원자가 끊이지 않는다. 한 기수는 대략 500명 선. 만 18∼25세의 고졸 또는 동등 이상 학력소지자로 신체등위 3급 이상이면 지원할 수 있다. 선발전형은 서류전형(고교생활기록부)과 면접, 신체검사 및 체력검정으로 이뤄진다. 복무기간은 24개월. 육군과 같고, 공군(28개월)과 해군(26개월)보다 짧다. 1950∼70년대엔 30∼36개월을 복무했지만, 1993년 이후 26개월로 줄었고, 2003년부터는 현 복무기간이 적용돼왔다.

    지원율이 높다보니 해병대에 합격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2004년 지원율은 3.5~5대 1. ‘재수’ ‘삼수’를 하는 신세대가 허다하다. 한번 재도전할 때마다 1점씩 가점된다. 이 때문에 2회 이상 재도전해 합격하는 사례가 2004년 기준으로 기수별 평균 47%에 이른다. 오죽하면 “해병대 경쟁률이 일류대 입시보다 높다”는 조크가 나올까. 실제로 2005학년도 서울대 정시모집 평균경쟁률은 4.97대 1이었다. 심지어 2003년엔 ‘16전17기’로 입대에 성공한 ‘전설의 신병’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6월15일 현재, 1000기 신병 507명의 신상명세는 베일에 가려 있다. 하지만 이들이 6월21일 가입소한 뒤 그 면면이 조금씩 공개되면 그들의 선임병들처럼 수많은 화젯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물론 기수마다 30∼40명은 가입소기간 중 정밀 신체검사 결과 부적격 판정을 받거나 본인의 심경 변화에 따라 귀가조치된다. 이렇듯 해병대 입대는 자발적 의지에 달려 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열성 지원자는 라식수술을 한 뒤 입대하기도 한다.

    새로움 창조하는 강인한 생명력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해병대를 택하기는 부사관이나 장교도 마찬가지. 6월25일 소위 임관을 앞두고 교육을 받고 있는 사관후보생 100기(교육기간은 부사관 교육과 같은 14주. 해병대에선 이를 ‘신분전환교육’이라 한다) 188명(여성 6명) 중에도 ‘개성 만점’의 인물이 적지 않다. 특히 타군이나 해병대에서 이미 병역을 마친 ‘재입대파’가 많다.

    손상명(육군 2사단), 이동길(육군 1사단) 후보생은 육군 병으로 전역했고, 박현석(28) 후보생은 육군 중위 출신이다. 한상진 후보생은 해군 부사관 출신, 박태상·장훈상·정현식·이은찬 후보생은 모두 해병대 병으로 제대했다. 이효명 후보생은 사관후보생 99기로 임관한 오빠 이민오 소위와 함께 ‘남매 해병’이 됐다.

    태권도 선수이자 사범 출신인 이대철(23), 프로권투선수 출신인 홍영수(24) 후보생을 비롯한 체력파에다, 자동차 경주 심판원으로 활동하며 레이싱에서 2년 연속 우승한 윤석빈(28) 후보생 같은 이색 경력 소유자도 적지 않다.

    ‘1000期’ 맞는 대한민국 해병, 그들만의 세계
    왜 해병대인가. 쉽고 편한 것만 좇는다는 요즘 젊은이들이 그토록 해병대를 열망하는 이유는 뭘까.

    “해병대에는 새로움을 창조해내는 강인한 생명력 같은 것이 있다. 신병 모집에 잇따라 떨어질 때 우울과 낙담이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새로운 의지가 생겨났다.”

    일곱 번 도전한 끝에 1000기 신병으로 입소하게 된 박제성(20·광주시 금호동)씨는 “고교 때 좀 ‘노는’ 바람에 출석률이 좋지 않아 계속 떨어진 것 같다”며 “그 시절의 나태함이 후회스러워 지난해 6월 대학을 한 학기만 마치고 휴학한 뒤 해병대 병 모집 전형에 응시하면서 자동차 범퍼 제조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왔다”고 했다. 그의 형 현수씨도 해병대 제1사단에서 포병으로 복무 중이어서 이들은 ‘형제 해병’이 된다.

    역시 1000기로 입소할 대전의 김영상(19) 군도 다섯 번 시도한 끝에 합격했다. 하지만 13차례의 도전 끝에 합격했으나 합격 발표 이전에 입영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육군으로 입대한 대전의 나모(21)씨같이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병역의무를 기피하려 한국 국적마저 포기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 요즘이지만, 해병대에선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997기 장호재(22) 훈련병은 영국 국적과 홍콩 시민권이 있음에도 해병대에 입대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그는 입대 전 골드만 삭스 한국지사에서 근무했다.

    6월9일 빨간 명찰 수여식에서 만난 장 훈련병은 “나는 결코 영국인, 중국인이 아니다. 죽어도 한국인임을 포기하기 싫었다”며 “훈련이 다소 힘들긴 했지만, 강한 한국인임을 잊지 않으려 입대한 만큼 내 진정한 뿌리가 어딘지 분명히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6월17일 수료식을 마친 뒤 해병대 제1사단 보병으로 배치될 예정이다.

    DI와 훈련병은 ‘일촌(一寸)’

    이른바 ‘기수발’에 죽고 산다는 해병대의 끈끈한 결속력은 해병대 교육의 본산인 교육훈련단에서 시작된다. 민간인을 해병으로 탈바꿈시키는 ‘해병 만들기’의 주역은 ‘DI(Drill Instructor)’라 부르는 훈련교관. 해병대 훈련교관과 훈육요원은 타군과 달리 100% 부사관으로 이뤄진다. 이들은 병보다 우위의 체력과 정신력을 가져야 하는 만큼, 엄선된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그래서 해병대 전투병과 하사는 한결같이 DI를 꿈꾼다.

    DI는 실무부대 경험이 3년 이상이고 하사 이상인 부사관 가운데 근무평정과 체력, 품행이 뛰어난 이들이 선발된다. 일반인도 익히 아는 ‘빨간 모자’가 그들이다. 훈련병에겐 때로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자, 때론 엄정하면서도 속정 깊은 맏형 같은 존재다. 특히 타군에 비해 장교 비율이 7.1%로 낮고 진급마저 적체돼 만성적인 장교 부족 현상을 겪는 해병대에선 그 공백을 메우는 부사관의 역할이 매우 크다(육군 장교 비율 8.6%, 해군 14%, 공군 14.6%).

    해병대 지원자 중엔 체력에 자신 있는 이도 여럿. 반대로 내성적이고 유약한 심성을 ‘개조’하려는 이들도 상당수다. 이들 또한 DI의 지도에 따라 혹독한 교육과정을 거친 뒤론 해병대 특유의 가족적 단결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어느새 상관의 명령이라면 죽음도 마다않겠다는 강한 충성심과 형제애와도 같은 동료의식으로 무장된다. 특히 훈련병은 물론 부사관후보생과 사관후보생도 절대 피해갈 수 없는 ‘극기주’ 훈련은 졸음과 허기를 달래며 정해진 훈련을 낮밤으로 받아야 한다. 그 정점인 천자봉 행군은 해병대 창설 당시 ‘해병 1기’ 수료를 기념해 사령관 이하 전 병력이 경남 진해의 천자봉을 오른 이후 부동(浮動)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이 무렵이면 누구나 한계에 달한 자신의 육체를 정신력으로 지탱해가며 ‘해병의 길’을 깨닫게 된다.

    해병대에서 쓰는 고유의 용어도 그들만의 일체감 형성에 한몫 한다. 점호는 ‘순검’, 식판은 ‘츄라이’, 취사병은 ‘주계병’, 퇴소식은 ‘수료식’, 자대(自隊)는 ‘실무부대’ 하는 식이다.

    해병대의 모방하기 힘든 상경하애(上敬下愛) 정신은 사람의 성격이나 인성을 바꿔놓기도 한다. 교육훈련단 제1신병교육대대의 고참 DI 김건구(28·부사관후보생 243기) 중사도 그중 한 명이다. 한때 그의 직속상관이던 한 장교는 안동고 축구선수 출신인데도 이른바 해병으로서의 ‘각(角)’이 좀체 나오지 않던 그에게 5년 전 DI 선발에 지원할 것을 권했다. 그후 김 중사는 훈련병들이 ‘독종’으로 부를 정도의 ‘FM 해병’이 됐다.

    “교육훈련 내용은 DI별로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다만 훈련병들과 함께 뛰어다니며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지적하고 챙기기 때문에 ‘독종’으로 부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DI생활을 하는 동안 자긍심과 책임감이 높아졌다. DI를 지원한 것도 좀더 폭넓은 지식과 생각하는 기회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부각해 보고 싶어서였다.”(김건구 중사)

    9년간의 군생활 중 DI 생활만 5년째인 김 중사에겐 특별히 기억에 남는 훈련병이 있다. 지금은 제1사단 수색대대 상병으로 복무하고 있는데, 김 중사는 천자봉 행군에서 허리가 아파 낙오될 처지가 된 그 훈련병의 완전군장을 대신 메고 함께 정상에 올랐다. 김 중사가 “너는 해냈다”며 군장을 돌려주자 훈련병은 말없이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를 다시 조우한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그가 김 중사에게 ‘싸이월드’의 ‘1촌(寸) 맺기’를 신청한 것. 해병대의 병과 부사관, 장교가 한마음으로 끈끈하게 맺어짐을 방증하는 단적인 예다.

    이젠 해병대도 남성의 전유물은 아니다. 현재 복무 중인 여성 해병은 장교 37명, 부사관 29명(이상 2005년 임관예정자 포함). 이들의 병과는 포병·기갑을 제외한 전 부문에 걸쳐 있다. 앞으로 여군 수는 훨씬 늘어날 전망. 국방부 지침에 따라 해병대는 2020년까지 여군 장교 비율을 총 정원의 5.4%(104명), 2025년까지 여군 부사관 비율을 총 정원의 3.6%(143명)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2001년 임관한 여군 장교 1기(사관후보생 96기) 7명의 계급은 현재 대위다. 여군 부사관은 2003년 10명(부사관후보생 283기)이 처음 배출됐다. 하지만 해병대는 아직 여군 병을 모집하지 않고 있다.

    ‘GI Jane’과 ‘앙녀’

    해병대 일각에선 여군의 존재에 대해 “남성보다 체력이 약해 해병대 교육훈련을 하향평준화할 우려가 있으면서도 근무평정이나 표창 면에선 앞서 좋은 보직을 차지하는 등 미 해병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성 해병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불식하는 위풍당당한 여군 또한 없지 않다.

    그중 한 명인 이지애(26·부사관후보생 283기) 하사는 교육훈련단 DI 72명 중 홍일점이다. 부사관교육대대 2중대 2소대 소속으로 해병대 사상 첫 여성 DI다. 부사관후보생으로 교육받을 당시 남자 동료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지난해 12월 DI교육 대상자로 선발돼 무사히 훈련을 마쳤다. 앳된 얼굴이다. 하지만 167cm의 키에 58kg의 다부진 몸, 100m를 14초에 주파하는 스피드, 여기에 전남 나주시청 소속 사이클 선수 출신, 스포츠센터 트레이너 팀장으로 활동한 경력을 자랑하는 ‘철녀(鐵女)’다. 별명은 ‘GI Jane.’

    이 하사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중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인생의 전환점으로 해병대를 선택했다”며 “피교육생들에게 교육훈련에서 낙오되지 말고 동기들의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주문한다”고 말했다.

    2002년 임관한 이미희(26·사관후보생 97기) 중위는 해병대의 첫 여성 훈련소대장. 교육훈련단 장교교육대대 훈련관으로 초임장교 양성 임무를 맡고 있다. 6월25일 임관할 사관후보생 100기 교육에 한창인 그는 “직업인으로서 군인을 동경해왔고, 대학시절부터 리더십을 발휘해보고 싶은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며 “한때 스튜어디스를 꿈꾸기도 했지만, 지금은 ‘해병을 만드는 해병’에 대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까지 복무연장을 신청했다.

    이 중위의 아버지도 현역 해병대 원사다. 사관후보생들이 이 중위에게 붙인 별명은 ‘앙녀.’ 엄하고 독기 있는 그의 성격을 ‘앙증맞은 악녀(惡女)’로 표현한 것이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는 눈치다.

    해병대 여군과 관련,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6·25전쟁 당시에도 여성 해병이 있었다는 사실. 1950년 8월30일 입대한 ‘해병 4기’ 중엔 여자의용군 126명이 포함돼 있다. 이는 육군 여군 창설(1950년 9월5일)보다 6일 빠른 것. 전군 최초의 여군이다. 이들은 40여 일간 교육을 마치고 수료와 동시에 소위 2명, 병조장(상사) 4명, 1등병조 6명, 2등병조 15명 및 사병 등의 계급을 부여받고 해군본부와 통제부에 배치돼 1951년 7월경까지 근무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소재가 파악된 61명은 ‘여(女)해병 전우회’를 구성해 활동 중이다. 당시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입대한 김일선(75·제주시 연동) 전우회장은 “그때 여군으로 입대한 사람들은 교사, 대학생, 중학생으로, 진해에서 신병기초훈련을 받은 뒤 대부분 통신병과로 복무했다”며 “현재 두 달에 한번 회원총회를 열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난과 극복의 역사



    이쯤에서 해병대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자.

    해병대 창설은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작전에서 단시간에 적진으로 침투할 수 있는 상륙작전부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신현준 당시 해군 중령이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한 건의가 계기가 됐다. 신 중령은 초대 사령관, 김성은 당시 해군 중령(이후 제4대 해병대사령관, 제15대 국방부장관 역임)은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 시작은 초라했다. 1949년 4월15일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 격납고에서 해군 가운데 선발한 380명(이중 병은 가입대한 해군 신병 13기 중 지원한 300명으로, 이들이 곧 ‘해병 1기’다)으로 창설된 해병대는 변변한 무기조차 없어 옛 일본군의 99식 소총으로 무장했다. 전투복도 없어 질 낮은 국산 광목을 국방색으로 염색해 훈련복으로 썼다. 훈련방식도 일본 해군과 육전대식, 미군의 방식이 혼합된 상태였다. 게다가 강병(强兵) 양성 명목의 살인적인 단체기합과 무지막지한 ‘빠따’가 일상화돼 있었다.

    이렇게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출발했음에도 창설 때부터 엄격한 군율과 위계질서를 유지한 해병대는 6·25전쟁에서 ‘귀신 잡는 해병’으로 불리게 된 한국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지구 전투를 비롯,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한 진동리지구 전투, 인천상륙작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해 서울 수복의 상징이 된 서울탈환작전, 산악전 사상 유례 없는 승리를 거둬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받은 도솔산지구 전투, 적의 최정예 부대를 격퇴시켜 아군의 중동부 전선 통제권 장악에 기여한 김일성·모택동 고지 전투, 중공군 1개 사단을 섬멸한 장단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해병대 정신을 입증했다.

    해병대는 또 1965년 10월 건군 이래 최초의 해외 원정군인 청룡부대를 파월(派越), 1972년 2월 귀국 때까지 줄곧 전장의 최선봉에 섰다. 청룡부대는 베트남 최대 항구인 캄란에 상륙한 이후 캄란지구에서 투이호아, 추라이 및 호이안지구로 북상 전진하며, 파병 6년4개월간 여단급 작전 66회, 대대급 작전 109회, 소부대 작전 15만1347회를 통해 적 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화기 노획 4282정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파월병력 3만7304명 중 1076명이 전사했고, 2702명이 부상해 손실률은 10%에 이르렀다.

    해병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에서 가장 험난한 전투를 치러냈다. 생명의 위협에 직면한 전투현장에서 이룬 업적은 빛나는 전통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독특한 그들만의 정신으로 자리잡았다.



    ‘1000期’ 맞는 대한민국 해병, 그들만의 세계
    1987년 사령부 재창설

    하지만 해병대에도 시련은 있었다. 창설 24년6개월 만인 1973년 10월 ‘경제적 군의 관리 운영’이란 명목으로 해병대사령부 및 교육부대, 행정·군수지원 부대가 해군에 통폐합돼 각종 법률 등에 의해 임무와 권한이 상실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전투에선 한껏 명성을 떨쳤지만, ‘정치’엔 능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해군에 14년간 통합 운용되던 해병대는 전력관리상 문제점이 노출돼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의 개선이 필요해짐에 따라 해병대 부대를 통합 지휘할 기구인 해병대사령부를 1987년 11월 재창설한다. 또 1990년 8월 국군조직법에 해병대 관련사항을 재입법화함으로써 부대령 부대와 그 위상이 다른 직제령 부대로 해병대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됐다. 그후 국방부의 재경(在京)부대 교외이전 계획에 따라 1994년 4월 해병대사령부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일대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도 서울의 관문인 서부전선과 백령도·연평도 등 전략도서 방어를 주임무로 하면서 유사시 적의 옆구리와 후방을 강타하는 상륙작전을 전개해야 하는 해병대는 사령부 아래 6개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2개 사단(포항 제1사단, 김포 제2사단)과 1개 여단(백령도 제6여단), 연평도 방어를 맡은 연평부대, 교육훈련단, 상륙군지원단이 그것이다.

    해병대의 주요 전력 중 기동장비는 K-1 등 2종의 전차 100여 대, KAAV (Korean Assult Amphibious Vehicle) 등 3종의 상륙돌격장갑차 160여 대, K-200 계열의 장갑차 80여 대를 비롯해 모두 59종 3400여 대다. 상륙돌격장갑차를 제외하면 육군 지상장비와 거의 같다. 화력 면에선 K-9 등 4종의 자주포 200여 문과 4.2인치 등 3종의 박격포 700여 문을 갖췄다. 개인화기도 육군과 비슷한데, 다만 분대 및 소대급 기본화력이 육군보다 좀더 강화된 특징을 지닌다.

    명인·기인 열전

    역사가 오랜 만큼, 해병대를 거쳐간 인물도 많다. 우선 정계에선 현역 의원으로 한나라당 김기춘·공성진·박혁규·정병국 의원과 열린우리당 신학용 의원이 있다. 전직 의원인 홍사덕·정창화씨도 해병대 출신.

    관계 인사로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상범 전 국가보훈처장과 이희일 전 동자부 장관, 작고한 홍성철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법조계에도 30여 명의 법조인으로 이뤄진 ‘해병대 법조회’가 있다.

    재계에선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 김무일 현대INI스틸 대표이사 겸 부회장, 김동렬 아세아시멘트 사장이 해병대 출신이다.

    언론계에선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안병훈 LG상남언론재단 이사장, 연합통신 사장을 지낸 현소환 ‘뉴스앤뉴스’ 대표, SBS 사장을 지낸 윤혁기씨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문학계 인사로 소설가 황석영씨(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있는 소설가 현기영씨, 소설가이자 인하대 교수(국문학)인 김용성씨가 있다.

    연예인으로는 탤런트 임채무·김상중, 가수 김흥국·남진, 개그맨 임혁필씨가 해병대 출신이다. 배우 장동건을 해병으로 내세운 영화 ‘해안선’을 연출한 김기덕 감독도 해병 부사관 출신이다.

    창설기와 6·25전쟁기, 베트남전쟁기의 인물 중에도 독특한 개성과 해병정신을 보인 이들이 수두룩하다. 해병대 기합의 대명사로 불린 강복구 전 해병대전우회 총재, 일본 관동군 총검술 교관 출신의 강용 대령, ‘삼국지’의 영웅을 동경해 자신이 사살한 공비의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 상관에게 내보인 진두태 중위 같은 창설기의 ‘괴짜’들을 비롯해 군기 확립을 위해 가짜 총살형을 집행한 중대장,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은 죄책감에 자결한 소대장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20여 년의 해병대 정훈장교 복무경험을 바탕으로 ‘해병대의 명인·기인전’(전2권) 등 해병대 관련 저서만 10여 권을 펴낸 정채호(79) 예비역 중령은 “해병대 56년 역사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해병대를 일궈낸 명인(名人)들과 개성이 뚜렷하고 갖은 기행(奇行)을 보여준 기인(奇人)들은 물론, 이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모든 해병이 함께 이룩한 것”이라 말한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1950년대 명문여대생 등 70여 명의 부녀자와 엽색행각을 벌인 ‘희대의 카사노바’로, 재판과정에서 ‘법은 정숙하고 순결한 여성의 정조만 보호한다’는 유명한 판결을 이끌어내며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간에 각인시켰던 박인수씨도 해병대 대위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파면돼 결국 불명예 제대함으로써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의 대열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해병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병대전우회(총재 김명환 예비역 중장)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이 해병대의 존재 이유이며, 이를 위해선 모든 면에서 특출해야 한다는 ‘최고 정신’은 종종 해병대 출신조차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크고 작은 소동으로 이어져 ‘개병대’ ‘패거리 문화’란 오명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요란스러움은 한편으로 군문(軍門)을 떠나서도 해병대 사령부를 ‘모군(母軍) 해병대’라 부르며 70이 넘은 할아버지도 얼룩무늬 위장복에 빨간 모자를 쓰게 만드는 특유의 결속력을 자랑하는 전우회를 태동시켰다.

    전우회의 효시는 1970년 예비역 해병·해군 원로들이 결성한 ‘서해구락부.’ 그러나 서해구락부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됐다. 그후 1988년에 해병대전우회가 공식 출범했다.

    해병대 예비역 수는 80여 만명. 이중 병 출신 예비역은 61만여 명에 이른다. 전우회에는 중앙회를 중심으로 전국 16개 광역시·도 연합회와 235개 시·군·구 지회가 조직돼 있다. 해외 전우회도 17개국에 56개 지회(미국 35개)가 있다. 컨테이너 박스를 사무실로 쓰는 분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전우회의 활동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기초질서 확립을 위한 교통정리, 방범순찰, 청소년 선도, 불우이웃돕기, 수중환경보호, 인명구조활동, 각종 재난구조 자원봉사 같은 일련의 봉사활동이다. 올해 1월엔 전우회 사상 최초의 해외자원봉사활동으로 쓰나미 피해가 가장 심했던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지역에 11명의 자원봉사단을 파견, 10일간 방역활동과 방역마스크 배분 활동을 했다.

    해병대전우회중앙회 강신길(60·해사23기) 사무총장은 “현 총재가 취임하기 전까지 전우회는 최근 몇 년간 과거 총재 선거를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두 파로 갈라져 혼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직을 재정비하는 중이다. 80만 예비역이라곤 하지만 실제 회원 수는 공개하기 곤란하다”면서도 “전우회 운영은 회비를 걷지 않는 대신 전액 예비역 해병의 자발적인 기여금에 의존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우회의 숙원사업은 해병대전우회관 건립이다.



    전우회의 ‘모군(母軍) 사랑’

    전우회와 별도로, 현역 해병대도 민·군간 유대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해병대 캠프’ 운영이 대표적이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 한 차례씩 개최하는 해병대 캠프는 민간인이 해병 부대에서 소정의 훈련과정을 거치며 극기체험을 할 수 있는 4박5일 프로그램. 해병대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를 받으며, 유료로 운영된다. 고된 과정인데도 사서 고생하려는 사람들이 중·고생부터 가족 단위 지원자까지 줄을 잇는다. 이들은 해병대 제1사단에서 부대 견학 및 내무생활, KAAV 탑승훈련, IBS(상륙용 고무보트) 기초훈련을 받는다.

    해병대에 대한 열정을 감추지 못하는 해외전우회 회원들은 자녀를 이 캠프에 보낸다. 3∼5대 1에 이르는 경쟁률을 쉽게 뚫기 위해 우선 선발될 수 있도록 캠프에 입소해야 하는 이유를 절절이 적어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1997년 사회공익 교육사업으로 시작된 해병대 캠프가 2004년까지 배출한 교육생은 무려 2만800여 명이나 된다.

    ‘잡종강세’의 ‘강소군(强小軍)’

    해병대는 지난 5월2일 김명균(해사27기) 중장을 신임 사령관(제27대)으로 맞았다. 해병대가 추구하는 ‘미래 해병대’는 어떤 모습일까.

    해병대사령부 관계자는 “해병대는 궁극적으로 ‘비전(vision) 2025’에 의거해 분쟁의 성격과 강도에 따라 편조 개념으로 적절한 부대를 편성, 운용하는 다목적 신속대응군 임무를 수행하는 공지(空地)기동부대를 지향한다”며 “따라서 해병대 부대 구조는 현재 2만7000여 명인 병력을 장기적으로 감축하고 항공단과 군수지원단까지 두루 갖춘 해병공지기동부대(MAGTF)로 개편할 방침”이라 밝혔다. 공지기동부대란 해병대 독자적으로 지(地)·해(海)·공(空) 3차원의 전력을 구비해 전투상황에 따라 적시에 적절하게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부대를 의미한다.

    역사가 가장 오랜 영국 해병대의 마스코트는 불독, 미국 해병대의 그것은 투견의 대명사격인 핏불테리어다. 한국 해병대의 마스코트는 진돗개. 하지만 이젠 더욱 어울리는 상징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해병대는 창설 당시 구령이나 도수훈련은 해군의 그것을, 전술훈련은 육군의 것을 차용했다. 그런데도 이후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해 ‘상승불패’ 전통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신화’가 됐다. 이런 해병대를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 ‘잡종강세(雜種强勢)’를 띠고 태어난 ‘라이거(liger)’에 비유한다면 과장일까. 라이거는 번식능력이 없어 1대(代)에 그친다. 그러나 대한민국 해병대는 끊임없이 수혈되는 ‘청춘의 끓는 피’로 1000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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