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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살인, 성폭력의 그늘

‘짐승’에게 강간당하고, 사회에게‘왕따’당하고…

  • 글: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인격 살인, 성폭력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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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A씨와 이성관계로 사귀면서 성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나 A씨의 성폭력 상담기록 등에 부합하지 않고, 피고가 원고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 제한적이어서 합의에 따른 성관계로 보이지 않는다. 피고의 범행으로 원고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했을 뿐 아니라 이후 수사과정에서 받은 고통으로 일시 기억상실 등의 피해를 본 만큼 금전으로나마 위로할 의무가 있다”며 피해자에게 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수사과정에서 동일한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를 두고 경찰과 검찰의 판단이 엇갈린 이해하기 힘든 일도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4월 A(여·27)씨가 B씨 집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하면서다. 경찰은 두 사람의 진술이 계속 엇갈리자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한 후 “A씨가 진실을 말했을 가능성이 98.2%, B씨가 거짓말로 혐의를 부인했을 가능성이 97%”라고 결론짓고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거짓말탐지기 검사실에 조회한 결과 B씨의 반응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지만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심리상태에서 나온 신체반응일 수 있다”며 B씨를 무혐의 처분했다. 그 직후 A씨는 가해자의 거짓말탐지기 수사기록 공개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다.

재판부 따라 유·무죄 왔다갔다

힘겹게 기소처분을 받아 가해자를 법정에 세울 기회를 얻었다 해도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린다. 재판과정에서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고, 비슷한 사건을 놓고 재판부에 따라 판결이 엇갈리기도 한다. 피해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는 정신지체 2급 장애인 여성 A(사건 당시 22세)씨를 성폭행한 혐의(강간 등 상해)로 기소된 B(25)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대로 징역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강간죄에서 폭행이나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하지만, 폭행 및 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이고 폭행 경위와 피해자와의 관계, 피해자의 연령이나 지능 등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 정신지체 2급 장애인인 피해자로 하여금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므로 강간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장애인임을 감안해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 정도가 약하더라도 형법상 강간죄로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피해자가 정신장애는 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평소 자신의 신체를 조절할 능력도 충분히 있다는 점 등에서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해석해보면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할 경우 오히려 무죄 판결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성폭력특별법상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라면 강간죄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사 사건에서 재판부가 형법이 아닌 성폭력특별법을 적용해 무죄 판결이 난 사례가 있다. 지난해 9월 부산고등법원은 한동네에 사는 미성년 장애인 A(17)양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B(남·69)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마을 어른’인 B씨가 겁을 줘서 옷을 벗게 한 후 성폭행한 점은 인정되지만 절대적으로 항거가 불능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 이 경우에도 가해자의 상당한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앞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형법을 적용했더라면 유죄 판결이 가능했으리라는 게 법조계 일각의 시각이다.

현행 성폭력특별법 제8조(장애인에 대한 간음 등)는 신체적·정신적 장애인을 특별히 보호하고 이들을 상대로 성폭력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를 더욱 엄중하게 처벌하기 위해 1997년 개정됐다. 이 가운데 ‘항거불능 상태’라는 모호한 법조문이 문제다. 앞의 사례는 바로 이 법조문이 거꾸로 장애인 피해자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침묵 속 절규’, 동성강간

미국, 호주를 비롯한 선진국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상대의 ‘적극적 동의’ 없이 이루어진 모든 성적 행위를 강간으로 간주한다. ‘동의’는 온전한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 이뤄진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필사적 저항’이 없었을 경우 화간(和姦)을 의심받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권주희 상담부장은 “저항 과정에서 아이의 손목에 멍이 들었고, 가해자가 성폭행 당시 손목을 눌렀다고 했음에도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받은 사례가 있다”고 소개했다. 성폭행을 당한 뒤 도망치다 끌려가는 상황에서 심한 구타와 폭행을 당했지만 무죄 판결이 내려진 사례도 있다.

권 부장의 설명이다.

“피해자가 끌려가는 과정에서 도와달라고 소리쳤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재판부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 반면 증인으로 나온 목격자가 ‘두 사람이 신호등에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 점, 가해자가 피해자를 끌고 다니는 과정에서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점 등을 들어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기각됐다. 심한 구타와 폭행이 수반된 성폭행에서 피해자의 신체적·정신적 무기력 상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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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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