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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다석 유영모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 박영호

“김용옥이 하버드 나온 걸 자랑하지만, 나는 똥 푸며 진리 깨쳤소”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다석 유영모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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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직 땀 흘리고 농사지으며 다석을 사모하고 공부해온 사람. 20대 시절 책에서 얻은 생각을 평생 순결하게 지켜온 사람. 은둔 철학자, 박영호. “모든 종교는 같은 뿌리에서 온다”고 설파하는 그는 평생을 바친 다석사상의 최고 권위자로 우뚝 섰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하나뿐인 제자 박영호
처음듣는 이야기로 시작하자. 아주 신기해서 역시 공부하는 사람은 눈이 맵기가 예사 아니라고 자꾸 감탄케 하는 이야기다.

“고독할 때 외로울 고(孤)가 아들 자(子) 변에 외과자(瓜)가 들어가지요? 영어의 멜론(melon)도 me 뒤의 lon이 외롭다(lone)는 뜻이지요? 우리말 ‘참외’ 의 ‘-외’도 외롭다는 뜻 아닐까요? 그게 왜 그럴까 생각해본 일 있습니까?”

바싹 다가앉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의문을 갖기는커녕 숱하게 그 단어를 발음하면서도 거기 주목해본 적이 없다. 참‘외’와 메‘LONE’과 고독할 ‘孤’에 나오는 ‘瓜’라!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참외밭을 유심히 뒤적거려봤습니다. 그랬더니 참외는 한 덩굴에 하나씩만 열리더군요. 참외 하나에 이파리 하나가 이렇게 덮여 있어요. 개체는 외로운 거죠. 단독자인 인간도 태어나면서부터 참외처럼 고독할 수밖에 없어요. 전체인 ‘한아님’이 내 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고독하지 않게 되는 거지요”

여윈 몸매에 형형한 눈매를 지닌 박영호(朴永浩·72) 선생을 만났다. 지치는 낯빛 없이 일곱 시간을 이야기했다. 일어서 보니 시간이 거짓말처럼 그렇게 흘러가 있었다. 그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의 두 명뿐인 제자 중 한 분이다. 김흥호 교수가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하고 강의했다면 그는 스승의 뜻대로 오로지 이마에 땀 흘리고 농사짓는 삶을 살며 다석을 사모하고 공부해왔으니 유일한 제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 다석 선생에게 ‘마침보람’이라 적힌 봉함엽서를 받은 적도 있으니 일종의 졸업증서를 수여받은 셈이다. 그걸 받은 사람은 이제껏 박영호가 유일하다니 하나뿐인 제자라고 말해도 과장된 건 아닐 거다.



“다석사상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혼합종교 아니냐고도 하고 다원주의 아니냐고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차라리 일원다교(一元多敎)라고나 할까요? 겉으로는 무슨 종교를 표방해도 결국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다석 선생은 세간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알려지기를 원치도 않았다. 그저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씨알’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이지만 독특한 신관(神觀)과 인생관을 가진 철학자로 사후에야 그를 연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함석헌 사상은 그저 다석의 갈비뼈 하나를 풀어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학자들 사이의 통설이라 한다.

“‘오똑앉을 궤’라는 글자가 있어요. 발족(足) 위에 위험할 위(危)자를 쓰는 글자인데…. 서울 구기동 집으로 다석 선생을 뵈러 갔더니 그런 자세로 앉아 계셨어요. 수행법의 하나죠. 52세 되던 해 널을 한 감 짜서 널 밑판(그러니까 칠성판이죠)을 깔고 그런 식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전에 힘을 주고 앉아 계셨어요. 우리는 선생님 앞에 30분만 마주앉아 있어도 몸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죠. 하루 일식만 하시고 널 위에서 주무시고 가족들 모아놓고 해혼을 선언하셨죠. 해혼요? 결혼의 반대죠. 맺을 결(結)이 아니라 풀해(解)자 해혼. 동거는 하지만 잠자리를 같이하진 않는다는 뜻이에요.”

톨스토이로 맺은 인연

그럼 박영호 선생은 다석을 어찌 만나 제자가 되었나? 역시 6·25전쟁이 거기 가로놓여 있다. 이야기는 절실하고 핍진(逼眞)하고 뜨거웠다.

“우리집은 대구 팔공산 너머 마을인데 6·25전쟁 때 격전지였어요. 안동, 의성, 대구가 전선의 마지막 라인이었잖습니까. 낙동강전투가 고향마을을 중심으로 벌어져 한 달을 밀고 밀리면서 싸웠으니 주변이 온통 시산혈해(屍山血海)였어요. 인민군과 국군의 시체가 서로 섞여 썩느라 냄새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인민군은 노새에다 보급품을 실어 날랐거든요. 제공권을 뺏겼으니 비행기로는 물자를 실어 나를 수가 없어 그랬겠지요. 그 노새가 숱하게 죽어나자빠져서 또 다른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어요.”

눈앞에서 즉결처분하는 것도 수시로 목격했다. 그의 나이 열일곱, 공업학교에 다니다 말고 헌병대에 배속되어 장총을 하나 얻어 메고 군복을 얻어 입었다. 근방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군인들의 가이드 노릇을 했다. 죽이는 사람과 죽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도 많이 봐서 그는 신경쇠약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오열(五列·간첩)이 넘어왔어요. 헌병은 쫓아오고 오열은 도망가는데 더는 갈 데가 없으니까 우물 안으로 들어가버려요. 거기다 총을 갈기니 우물이 온통….”

그런 장면이 떠올라 밤이 돼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이 무슨 투시경이 된 듯 사람이 걸어다니면 그 안에 든 해골이 훤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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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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