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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천한 민족은 신명을 아랫도리로 풀고 귀한 민족은 어깨 위로 끌어올리지”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사진 정경택 기자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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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마다 명칭은 달라도 가면극의 내용은 대개 비슷하다. 사방신에게 놀이 시작을 알리는 의식무를 춤의 서두로 삼으면서 파계승과 양반을 풍자하고 처첩간의 갈등을 서사의 골격으로 삼는다. 서양극처럼 발단에서 전개, 절정, 결말이 일목요연하지는 않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과장(科場)별로 다른 엉뚱한 내용이 등장하고 물론 춤도 달라진다.

우리가 언제부터 가면극을 추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승려와 양반계급을 비판하는 내용이 중심축인 걸로 미루어 조선왕조 서민들이 울분을 푸는 도구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경제 사회적으로 대중의 위치가 급부상한 조선 후기, 18세기 말엽쯤에 와서야 이런 가면놀이가 신명나게 공연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대개의 탈놀이는 불명확한 구전으로 전해지지만 고성만은 다른 어디에도 안 보이는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30년, 서기로는 1893년, 고성에 부임한 부사 오홍묵은 호기심과 관찰력이 탁월한 벼슬아치였던 모양이다.

그는 낙도와 산골오지로 둘러싸인 고성의 풍물과 대소사를 꼼꼼히 기록해서 ‘고성총쇄록’이란 진귀한 사료를 남긴다. 거기 음력 섣달 그믐날 관아마당에서 벌어진 오광대 놀음에 대한 생생한 관찰기가 있다. 역시 기록만이 세월을 뛰어넘는다.

‘…내가 풍운당을 돌아보니 아전의 무리들이 나악을 갖추고 유희를 하고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해마다 치르는 관례라고 답변한다.…(중략) 나희배들이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펄쩍 뛰어 오르는 등 온통 시끄러이 떠들며 일제히 관아의 마당으로 들어온다. 마당 한가운데 석대 위에는 미리 큰불을 마련해놓았는데 대낮처럼 밝다. 악기를 마구 두들겨 어지럽고 시끄러워 사람의 말을 구분하기 어렵다.…(중략) 괴이하고 이상한 무리들이 순서대로 번갈아 가며 나와 서로 바라보며 희롱하고 혹은 날뛰며 소란스럽게 떠들거나 혹은 천천히 춤을 춘다. 이같이 하기를 오랫동안 하다 그쳤다. 이곳의 잡희는 함안의 것과 대략 비슷하지만 익살은 보다 나은데 복색의 꾸밈은 다소 떨어진다.’



고성부사 오홍묵은 아전(서민)들의 놀음을 외면하지 않고 비교분석까지 한 관리였다. 그러나 우리 역사 대부분이 그렇듯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전승은 기운을 잃는다. 수탈로 생활은 피폐해지고 서러운 겨레붙이가 함께 모여 흥겨워하는 꼴을 일제가 달가워했을 리 없다. 대신 서구식 신파극과 곡마단과 신식 가수들이 등장해 탈놀이의 관객이 점차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고성만은 조금 달랐다. 왜 달랐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다. 다른 지방과 달리 아까 동구나무 밑의 세 명이 건재했던 것이다. 그들은 몇십년 오광대를 공연하지 못했지만 기능까지 잊은 건 아니었다. 해방되자마자 분주히 오광대 모임을 규합해 1946년 당시 고성읍 최신식 건물인 가야극장에서 감격에 찬 한 마당을 펼친다. 당시 공연은 16㎜ 필름으로 기록되었다. 1970년대 이윤석 회장도 여러 번 돌려본 적 있지만 지금은 자취를 잃고 말았다.

“짜임새가 엉성하긴 했어도 다섯 과장이 알뜰하게 갖춰진 공연이었어요.”

그러나 곧 전쟁이었다. 전쟁 속에서 말뚝이를 잃고 양반을 잃으면 춤은 계속될 수가 없다.

조용배와 천세봉의 전설

하지만 고성엔 희한하게도 어느 시절 어느 난국에도 언제나 ‘춤에 환장한 영감’ 한둘이 반드시 있었다. 그들이 오광대 춤을 끈질기게 이어갔다. 권번 춤선생이던 김창후(1887~1965), 홍성락(1887~1970), 천세봉(1892~1967)이 모두 타계하자 이어서 전세대보다 더욱 탁월한 춤꾼 조용배(1929~91)와 허종목(1930~95)이 등장했다. 이윤석은 바로 이들에게서 춤을 배웠다. 이윤석뿐 아니라 현재 오광대 춤꾼 모두 두 사람의 문하생이다. 고성읍 동외리 ‘고성 오광대 보존회’ 강당엔 그 어른들의 노랗게 낡은 사진이 액틀에 담겨 드높이 걸려 있다.

조용배와 허종목의 행적은 이미 전설이 됐다. 고성 사람들은 군수 이름은 몰라도 애어른 없이 등 뒤에 피리(단소) 꽂고 초서와 매난국죽에 능란한 붓 한 자루 괴춤에 차고 풀 먹인 도포 입고 논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던 조한량(조용배의 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조한량은 한때 승려생활을 하다 고성 인근에 은거하던 석암 선생에게 한학을 배우던 중 오광대에 입문했고, 허종목 또한 마산상고 재학시절 기방 춤선생에게서 굿거리춤, 지성승무, 양반춤, 학춤을 고루 배운 후 고향에 돌아와 오광대에 입문한다. 그들은 매일 30리 길을 다니며 김창후에게서 양반춤을, 천세봉에게서는 말뚝이와 승무를, 홍성락에게서는 가면제작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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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사진 정경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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