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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의 삶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천한 민족은 신명을 아랫도리로 풀고 귀한 민족은 어깨 위로 끌어올리지”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사진 정경택 기자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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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이윤석 회장은, 환갑의 나이에도 자태가 여전히 고운 아내와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는다.

그런 조용배, 허종목 두 사람이 나눠지던 오광대의 짐을 1970년대 들어 한몸에 몰아서 받은 이가 바로 이윤석 회장이다. 그는 이미 개인이 아니었다. ‘스타’라기엔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 한몸으로 얽혀 있어 적당치 않고,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두령’쯤은 될 것 같았다. 고성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증거를 나는 잠깐 만에 여러 번 엿봤다.

이윤석은 고성오광대 보존회 회장이기 전에 마암면 명송리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다. 춤꾼보다 농사꾼이 본업임을 자꾸 강조한다. 아니 춤과 농사가 둘이 아닌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오광대는 농한기나 명절에 그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풍물패와는 다르다.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쯤 되니 여기저기 공연도 많고 전수자도 길러내야 한다. 농사에 매일 수 있는 절대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면서 농사를 계속하자면 엄청나게 부지런할 수밖에 없고 아내의 전폭적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고성 사람들은 입 모아 오늘의 이윤석이 있는 것은 다 그의 아내 덕분이라고 평한다. 밭에 일거리를 두고 훌쩍 춤추러 가버리면 남은 일은 고스란히 아내 몫으로 돌아갔고, 그걸 언제나 군말 없이 감당해줬다는 걸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20년 전부터 비닐하우스를 시작해 별의별 작물을 다 심어봤지만 목돈을 만진 기억은 별반 없다. 추수 때의 가격을 정확히 짚어내 농사 품목을 정해야 하건만 늘 뒷북을 치거나 너무 앞서가버렸다. 오이, 호박, 고추, 국화, 안개꽃, 큰 토마토, 방울토마토가 다 그랬다.



오광대 보존회의 젊은 총무 황종욱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재담가로 “고성에 하우스 농사만 했다 하면 꼭 잘못 짚는 사람 둘이 있어요. 우리 회장님하고 또 저기 사는 누구하고! 고추값이 좋은 해는 토마토를 심고, 토마토가 값이 나가는 해는 고추를 심고. 어찌 그리 딱딱 잘도 맞추는지. 그리고 설령 새벽에 마산 청과시장이나 김해 화훼공판장에 나가 제값 받고 팔아도 소용없어요. 보존회에 전수하러 나올 시간이 급해 과속딱지를 끊으면 그 돈은 결국 모조리 국가로 귀속되는 걸….”

올해는 농사 재미를 좀 볼 것 같냐고 물었더니 그는 “재미를 못 봤다는 건 바꿔 말하면 화를 피했다는 뜻과 같아요. 아 내가 그까짓 짧은 재미를 위해 큰 화를 불러들일 사람 같습니까?” 한다. 농담이지만 대충 삶의 태도가 읽힌다. 안달하지 않고 매사 느긋하다. 양말에 구멍이 난 걸 누가 지적하면 그는 태연히 “아, 이거 무좀 방지용이야” 하고 말은 늘 에둘러서,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휘어지게 한다.

“턱 하면 울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고, 탁하면 누구네 집파리 잡는 소리제.”

“여기서 나고 여기서 죽을 낍니더”

나는 이윤석의 비닐하우스에서 앵두처럼 고운 방울토마토를 배불리(?) 따먹었다. 과일가게에서 파는 놈과 모양은 같아도 맛은 달랐다. 싱그럽기도 하려니와 당도가 훨씬 높았다(토마토도 당도를 따지는지는 모르지만….) 상품가치가 덜 되는 자잘한 놈은 따로 골라놨다. 갖다 줘야 할 곳이 아주 많다. 가까운 절의 차 없는 스님에게 한 상자, 혼자 사는 노인에게 한 상자, 식이요법이 필요한 친구에게 또 한 상자.

그는 고성에서 나고 자라 지금껏 고성을 뜬 적이 없다.

“여기서 나서 여기서 살고 여기서 죽을 낍니더.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거 아입니꺼. 좋은 재목들은 다 서울로 뽑혀서 가버리고. 선산 지키는 나무도 필요하다 아입니꺼.”

자조의 빛깔 전혀 없이 스스로 굽은 나무라고 할 수 있는 힘은 오광대의 신명을 함께 푸는 동료들에게서 나왔을 게다. 저 활달한 성품에 자그만 고을이 답답하지 않을까? 거기에도 해답은 있다.

그가 오광대에 입문한 1970년대 이후 작은 마을 고성엔 방학만 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많을 때는 한해 1000명을 헤아리는 숫자가 찾아왔다. 오광대를 배우려는 대학 탈춤반 학생이거나 직장 문화패들이었다. 그가 앞장서 전수 조교가 됐다. 앉아서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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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사진 정경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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