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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의 삶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천한 민족은 신명을 아랫도리로 풀고 귀한 민족은 어깨 위로 끌어올리지”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사진 정경택 기자

고성 오광대놀이 ‘농부 춤꾼’ 이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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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는 오지였으나 고성은 문이 활짝 열린 동네였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중국에서도 춤 배우겠다고 찾는 사람들이 늘 있었으니 소외도 고립감도 없었다. 지금껏 3만명이 고성에 와서 오광대 춤을 배워갔다. 그들은 모두 이윤석의 거침없고 활달한 말뚝이춤에 반했다. 마스터까지는 못해도 잠시나마 말뚝이춤의 매력과 멋을 시늉은 해보는 것이다.

내가 내려갔을 때는 상명대 국문과 팀과 부산 동의대 탈춤반 신입생들이 오광대의 기본무를 배우고 있었다. 이윤석은 앞장서서 춤동작을 시범 보이면서 “자, 동작을 크게 하라고. 암만 크게 해도 아무도 돈 달라는 사람 없으니 팔을 활짝 벌려. 쩨쩨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기도 하고 “양악에 길들어 우리 가락이 괜히 어렵지? 그냥 몸을 가락에 턱 맡겨버려” 하기도 했다. 가르치는 데 이력이 난 솜씨였다.

과연 오래지 않아 학생들의 몸은 장구와 북장단에 절로 풀렸다. 어깨가 저 혼자 들썩거렸다. 우아한 어깻짓을 하면서 이윤석이 하는 말을 나는 아하, 하며 받아 적었다.

“고상하지 못한 민족은 신명을 아랫도리로 푼단 말이야. 다리와 엉덩이만 요란하게 비비적대며.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고귀한 민족은 신명을 어깨위로 두둥실 끌어올리지. 이렇게! 이렇게!”

세 명의 어머니



철이 들고 보니 그는 어머니가 셋이었다. 그 때문에 바늘방석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백부는 고성서는 제법 살림이 넉넉한 축이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둘째부인을 얻었지만 생산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은집 둘째이던 그가 백부 앞으로 입적이 됐다. 물론 그가 어릴 적 일이니 이윤석은 내막 모르는 채 친모와 친부를 숙모와 숙부라 부르며 자랐다.

“모두 한집에 살았어요. 생부는 백부 밑에서 머슴 살다시피 했으니까….”

그러니 가족구성원 자체가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중 들어온 백모가 강신을 받았다.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사람이 많았다. 기질이 강하고 경제력도 있어 집안은 그 작은 백모 위주로 돌아갔다. 신 내린 그 어머니가 윤석을 특별히 사랑했다. 늘 끼고 살고 싶어 했다. 자연히 세 어머니가 어린 윤석을 앞에 두고 경쟁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힘없는 친모는 “내가 네 친엄마다”라는 말도 못한 채 그저 몰래 불러내 먹을 거나 건네며 눈물짓는 식이었지만, 나이 들면서 점점 사태를 짐작하게 됐다.

“사랑을 엄청나게 받았어요. 그러나 동시에 엄청 눈치를 봐야 했고. 집안에 분란과 갈등이 하도 많으니 지긋지긋하데요. 어린 마음에도 결심을 딱 했어요. 내가 만약 가정을 갖는다면 싸우지 않고 사는 게 우선이라고. 절대 분란을 만들지 않겠다고….”

공부는 재미가 없었다. 운동이 좋았다. 인근 회화면의 회화중학교를 다닐 때는 배구도 하고 기계체조도 했다. 한동네엔 오광대 예능보유자인 허판세 선생이 살고 있었다. 신명나고 흥미 있어 그 집을 드나들며 잔심부름도 하고 구경도 했다. 꽹과리 장단에 절로 어깨춤이 추어질 적도 많았다. ‘춤은 생명력이구나’ 하는 깨달음 비슷한 것도 그 무렵 느꼈다.

그는 분란 많은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일 없이 바다 기슭에 앉아 있곤 했다. 울분이 터지면 둥더덩 덩덩 하는 북가락이 마음속에 솟아났고 그 장단을 한참 따라가다보면 마음이 씻은 듯 가라앉았다.

학교 졸업 후엔 동네를 어슬렁대다 돈을 한번 벌어보자 싶어 참꼬막잡이 배를 한 2년 타기도 했다.

“그때 모은 돈으로 집 짓고 논도 좀 사고 했어요. 노인네들 성화에 다시 집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어느새 스무 살이 됐고 동네 사람 누군가가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키 크고 인물 좋고 심덕 무던하고 살림 있고 부지런하고, 어느 모로나 일등 신랑감이었으니 주변 사람들이 그냥 두지 않았다. 일찍부터 중매가 시작됐다. 아니, 1960년대 말엽 경상도 고성에선 남자 나이 스무 살이 장가가기 딱 좋은 나이였다.

신부 또한 남 주기 아까운 처녀라 했다. 일 야물게 잘하고 마음씨 곱고 얼굴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했다. 양부가 중풍으로 누워계셨다. 죽기 전에 윤석이 혼인하는 걸 보고 눈 감는 것이 양부의 ‘꿈에도 소원’이고 ‘한이 일시에 풀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이 싫어 무작정 부산으로 도망쳤다. 양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찾으러 다닌다고 해 할 수 없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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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사진 정경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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