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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②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순종 임금의 장인이 300만원을 떼먹고 북경으로 줄행랑을 놓는데…’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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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조선의 마지막 국모인 비운의 여인 순정효황후. 품성이 남달리 어질던 순정효황후는 가족들의 방탕한 생활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차금대왕(借金大王)이라는 별명을 듣는 윤택영 후작은 지난 번 국상 때 귀국한 이후 100여 명 채권자의 기웃거리는 눈을 피하여 창덕궁 내전에서 일절 외부출입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각 채권자들은 다만 그 하회만 엿보고 있던 중, 국장도 이미 끝나고 장차 졸곡(卒哭·곡을 그칠 때 지내는 제사, 망자가 죽은 지 석 달이 지나기 전에 지낸다-인용자)이 멀지 않았으므로 졸곡이 지나면 곧 다시 중국으로 갈는지 모르는 고로 채권자들은 조급히 서두르는 모양이라는데, 우선 송달섭, 도변경조(渡邊慶造) 외 12명의 채권자가 파산선고를 신청하여 오는 16일에 경성지방법원 민사부에서 공판이 개정될 터라 하더라. (‘조선일보’ 1926년 7월7일자)

이번엔 ‘왕’으로도 모자라 ‘대왕’이란다. 윤택영 후작이 빚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졌던 모양이다. 창덕궁 내전에 칩거했다면 황실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일 테고,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후작이라면 권세도 상당했을 텐데, 어쩌다 그처럼 많은 빚을 지고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부터 ‘채무왕’ ‘부채왕’ ‘차금대왕’ ‘대채왕(大債王)’으로 불리며 ‘빚의 제왕’으로 일세를 풍미한 윤택영의 인생유전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윤택영 후작이 ‘빚의 제왕’으로 군림한 것은 1906년 대한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태자이던 순종의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여러 가문에서 동궁계비(東宮繼妃) 책봉운동을 벌였다. 윤택영도 자기 딸을 태자비로 앉히기 위해 황실에 요샛말로 가열차게 ‘로비’를 했다. 50만원(오늘날로 치면 500억원)의 엄청난 ‘운동비(로비자금)’를 쏟아부은 결과 윤택영의 열세 살 난 셋째딸이 동궁계비에 책봉된다.

당시 윤택영(1876년생)의 나이는 고작 서른하나였다. 시운(時運)이 따랐는지 윤택영이 황태자의 장인이 된 지 1년 만인 1907년 고종이 양위하고 순종이 황제로 등극한다. 윤택영은 불과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황제의 장인 ‘해풍부원군’이 되어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움켜쥔다.

윤택영씨는 해풍부원군을 봉하시고 정일품상보국(正一品上輔國)을 제수하였다더라. (‘신한민보’ 1907년 7월4일자)



권력도 얻고, 명예도 얻었지만 윤택영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황실과 사돈을 맺기 위해 쏟아부은 50만원의 ‘운동비’ 태반이 빚이었던 탓이다. 어지간한 규모의 돈이었으면 참봉첩지라도 팔아 메울 수 있었겠지만, 워낙 큰 빚인 터라 100원씩 1000원씩 벌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곤궁에 처한 윤택영은 여느 사람 같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채무해결책을 생각해낸다.

해풍부원군 윤택영씨는 황후폐하 가례 시에 빚진 것이 50만~60만원에 달하여 곤란이 가볍지 않으므로 황실에서 물어주기를 희망한다더라. (‘신한민보’ 1910년 2월16자)

윤택영은 다짜고짜 황제를 찾아가 “폐하, 장인 빚 좀 갚아주시옵소서” 하며 생떼를 부린 것이다. 거듭 요청했는데도 황실에서 들어주지 않자 윤택영은 눈을 해외로 돌렸다. ‘허울뿐인 대한제국 황실에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빚을 떠넘기려면 돈 있는 곳에 줄을 대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 정부에 손을 벌린다.

해풍부원군 윤택영씨는 황후폐하 가례시에 50만원 빚을 졌는데 황실에서 물어주기를 운동하다가 아니 되므로 장차 일본으로 건너가 운동코자 한다더라. (‘신한민보’ 1909년 9월1일자)

일본 정부가 무슨 자선단체도 아니고 사위도 안 갚아주는 빚을 대신 갚아줄 리 있겠는가. 일본 정부는 이웃나라 황제 장인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다. 그러나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설 윤택영이 아니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실과 통감부에 자기 빚을 갚아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윤택영이 황실과 통감부를 상대로 채무해결 운동을 벌인 지 1년 만에 채무를 일거에 해결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호시탐탐 국권을 노리던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을 단행한 것이다. 윤택영은 황실의 외척으로 합방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에 봉작되고, 은사공채(恩賜公債·한일합방 유공자에게 총독부가 내린 사례금) 20만원을 받는다. 채무를 완전히 털어버릴 수는 없는 금액이었지만, 그럭저럭 빚쟁이들을 무마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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