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이렇다 보니 의금부 관원들도 난처하게 됐다. 법조문이 사건의 진상을 가리는 것을 막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상께서 새로운 법 해석을 내놓으셨다. “권채의 일은 비록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노비가 스스로 고소(告訴)한 것이 아니고 국가에서 알고 추핵(推劾)한 것이니”(09/08/27) 이 법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탁월한 해석이었다. 기존 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잘잘못을 가려낼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이틀 후 보고된 수사결과에 따르면 권채가 덕금의 학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의금부 제조 신상(申商)은 “이 사람은 다만 글은 배웠어도 부끄러움은 알지 못합니다”라면서 권채의 몰염치를 비판했다. 권채를 그의 종들과 대질한 결과 애초에 형조에서 조사한 것처럼 덕금의 학대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끝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형조판서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권채는 직첩(職牒·임명 사령서)을 회수당하고 외방에 부처(付處)됐으며, 그의 아내는 속전(贖錢·곤장 맞는 대신 내는 돈)을 내고 풀려났다(09/09/03).
이 판결에 대해 많은 사람이 너무 가벼운 처벌이라고 말했다. 권채에 대한 처벌은 그렇다 치고, 그의 아내는 좀더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신사(知申事) 정흠지나 내 생각은 달랐다. 다행히 여종 덕금이 아직 살아 있고, 역모와 관련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사대부집 부인을 함부로 처벌할 수 없는 국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권채의 문재(文才)를 아끼는 주상의 배려도 작용했다(권채는 곧 석방돼 집현전으로 복귀했다).
관리의 재량권과 백성의 고소권
나는 오히려 권채를 처벌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조정 관원이 계집종을 학대했다고 해서 직첩을 회수하고 귀양을 보내면 “그로부터 강상(綱常·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의 문란이 시작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주상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계집종일지라도 이미 첩이 됐으면 마땅히 첩으로 대우해야 할 것이며, 그 아내 또한 마땅히 가장의 첩으로 대우해야 할 것인데, 그의 잔인 포학함이 이 정도니 어떻게 그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09/09/04).
주상은 바로 그런 분이셨다. 상께서는 여종 덕금이 학대받은 사실에 대해서도 마음 아파하셨다.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人君之職 代天理物)이다. 만물이 그 처소를 얻지 못해도 오히려 대단히 상심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덕금이 인간의 대우를 받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셨다. 상께서는 모든 백성을 고르게 다스리려 하셨다. “진실로 차별 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 다스릴 수 있겠는가”(09/08/29)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셨기에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으셨다. 즉 사회 기강을 위해 이미 제정된 법을 존중하되 “억울하고 원통한 것을 펴주는 정치의 도리”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수령이 부민의 전답을 오판했는데도 그것을 고소하는 통로조차 막아버리면 장차 어떻게 되겠느냐”면서 이 법을 다시 논의해보라고 하셨다(13/01/19).
그후 2년간 계속된 토론과 숙의 끝에 상께서는 “부민이나 아전의 무리가 자기의 위에 있는 관리를 고소할 수 없게 한 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만약 자기의 원억(寃抑=寃屈·누명을 써서 마음에 맺히다)함을 호소하는 소장(訴狀)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원억한 것을 풀 수 없어서 정치하는 도리에 방해될 것이다. 그런데 그 고소로 인해 문득 오판의 죄를 처단한다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능범(陵犯)하는” 결과를 빚을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셨다.
황희, 맹사성 등의 동의를 얻은 다음 상께서는 내게 물으셨다. “자기의 원억을 호소하는 소장만을 수리해 바른 대로 판결해줄 뿐이고, 관리의 오판을 처벌하는 일은 없게 해 존비(尊卑)의 분수를 보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게 하되, 관리의 재량권도 존중하는 절충안을 내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애초의 내 뜻과는 달랐다. 하지만 수년 동안 논의하면서 주상이 강조하시는 “아랫사람들의 뜻을 통하게 하는(通下情)” 정치의 도리(13/01/19)도 “상하의 분별(上下之分)”(10/07/13)이라는 나라의 기강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신이 원한 바는 원억을 호소하는 소장을 수리하지 말아서 상하의 구분을 전일(專一)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지를 반포하신다면 거의 중용(中庸)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15/10/ 24)라고 말씀드렸다.
백성의 눈높이에서 정치 시작
솔직히 나는 주상과 달리 백성을 믿지 않는다. 상께서는 노상 “백성이 비록 어리석어 보이나 실로 신명한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에서 시작되고, 하늘이 듣는 것도 우리 백성이 듣는 데서 시작된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03/09/07)고 해 백성의 눈높이에서 정치를 시작하고,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정사를 결정하려 하셨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춰 백성은 대부분 신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공동의 삶이나 나라의 발전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앞의 ‘유감동 사건’만 해도 개인 차원의 ‘보복’ 탓에 얼마나 많은 유능한 공직자가 ‘희생’될 뻔했는가. 궁궐 안의 신문고를 마구 두들겨 호소한 민원도 태반은 거짓된 것이었다. 도성 안의 대로를 자꾸 침범해 집을 짓는 간특한 백성은(09/11/17) 또 얼마나 많은가.
나는 참람하게 격고(擊鼓)하는 무리를 처벌하는 게 어떠냐고 여쭈어보았다. 하지만 상께서는 중국의 예를 들어 반대하셨다. 즉 “옛날 원나라에서 소송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소하는 것을 금지하려고 중서성(中書省)을 두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백성의 뜻(下情)이 주달(奏達)되지 못해 마침내 대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명나라의 “태종 황제는 바로 대궐 안에 들어와 격고하게 하고 황제가 모두 친히 재결한다”(14/12/03)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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