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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평양 공연한 ‘국민 가수’ 조용필

“북한 관객들이 내 노래에 세 배로 감동 먹었대요”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사진·김형우 기자

평양 공연한 ‘국민 가수’ 조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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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달러라고 하면 거기서는 큰돈이거든요. 글쎄 나도 보도를 보고 이게 어느 쪽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궁금했어요. 아마 사실이니까 나왔겠죠. 아무튼 거기서는 제 공연에 관해 물어볼 겨를이 없었어요. 도착하자마자 환영 만찬이다 뭐다 해서 끌려다니느라 바빴어요. 3박4일 동안 공연 준비하고 공연 끝나고 나서는 인터뷰하고, 일정이 빡빡했어요.”

올해는 가수 인생 37년째인 조용필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다. 광복 60년, 대중문화 60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에서 최고 노래(‘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최고 가수로 선정됐다.

기지촌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던 무명가수 조용필은 1972년 아세아레코드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들어간 첫 음반을 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이 음반은 4년 동안이나 죽어 있었다. 1976년 조총련 모국 방문단의 한국 방문이 시작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에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삽시간에 국민가요가 됐다. 그해 이 노래는 가요차트 1위, 방송횟수 1위를 기록하며 무명의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각고 끝에 찾아온 희열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해 조용필은 대마초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리고 정부가 작성한 방송 금지가수 명단에 포함됐다.

1970년대 살벌한 유신 치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은 외아들이 연예인들과 어울려 대마초를 피운 사실을 알고 나서 격노했다. 전면적인 대마초 사범 검거령이 내려졌다.



조용필은 용주골 기지촌에서 공연할 때 미군 병사의 권유로 대마초를 몇 차례 피워본 일이 있다.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단속 열풍이 계속되면서 조용필은 남산(중앙정보부) 마약반에 불려가 “1969년에 대마초를 피운 일이 있다”고 자백하고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이것이 문제가 돼 방송에도 못 나가고 나중엔 무대에도 설 수 없었다. 그 시대엔 가혹한 이중처벌이 당연시됐다.

그는 대마초 이야기를 꺼내자 “과거 이야기는 재미없다”며 말하길 꺼렸다.

“사실 그때 생각이 잘 안 나요. 저는 어떤 생활철학이 있어요.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둬야 한다는 거죠. 과거가 나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미래가 더 중요한 법이지요. 또 오늘이 중요하고요. 남들이 제게 그때 얼마나 고생했냐고 곧잘 묻지만 전 고생했다고 생각지 않아요.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큰 꿈이 무너진 거죠. 그렇지만 현실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부터 내가 헤쳐나가야 된다기보다는 이제부터 새로운 걸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음악 연주도 하고, 다른 것도 하고…. 그런 일들은 지나간 추억에 불과하죠.”

방송과 무대 출연이 금지된 조용필은 좌절하지 않고 판소리와 남도창을 배우고 독자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제 목소리가 미성(美聲)이라서 좀 허스키한 탁성(濁聲)으로 바꿔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미성으로는 다양한 노래를 할 수 없어요. 탁성은 가능하죠. 판소리는 전부 탁성이잖아요. 어느 날 TV에서 조상현씨의 판소리 공연을 보다 ‘저걸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흥보전’ ‘심청전’ 판소리 레코드판을 샀어요. 사서 그대로 흉내내본 겁니다. 흥부가 놀부에게 가서 구걸하는 대목이 마음에 들어 100번 이상 불러봤죠. 제가 국악을 하려 했던 건 아니고, 목소리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였죠. 도움이 됐어요. 판소리에서 남도창과 서도 민요로 발전했죠. 그러다 ‘한오백년’도 부른 거죠.”

이 나라를 18년 동안 무소불위로 통치했던 박 대통령의 시대는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막을 내렸다. 박 대통령이 죽고 한 달여가 지난 1979년 12월 대마초 연예인이 해금(解禁)됐다. 동아방송 안평선 프로듀서가 막 풀려난 조용필에게 ‘창밖의 여자’라는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가 작곡과 노래를 부탁했다. 1960∼70년대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끌어 주제가가 히트곡이 된 경우가 많았다.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다.

조용필 시대의 탄생

‘창밖의 여자’는 당시 유행가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멜로디의 노래였다. 여기에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가창이 어우러지면서 듣는 이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창밖의 여자’는 조용필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안평선 프로듀서는 노래를 듣는 순간 전율이 느껴지며 ‘이건 된다’는 직감이 스쳤다고 뒷날 술회했다.

1980년 3월 정식 앨범으로 나온 이 노래는 국내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소득수준이나 물가와 비교할 때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대박이었다. 지구레코드사는 그에게 100만장 발매 기념 골드 디스크를 만들어줬다.

“미국 암펙스가 ‘골든 릴’을 주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인구 대비 최다 판매 음반에 주는 상이었죠. 제가 스케줄 때문에 미국에 가지 못해 미국대사관에 가서 받았죠.”

필자가 ‘그 노래가 그 시대에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조용필은 “그때 뭐 여러 가지 기사가 안 나왔나요?”라고 반문했다. 수없이 나온 이야기를 인터뷰 때마다 반복하자면 조금 짜증이 날 것이다. 필자도 ‘창밖의 여자’ 스토리를 사전에 공부하고 갔지만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노래이기 때문에 지금 이 시점의 견해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음악의 변화였죠. 멜로디와 가사의 변화, 또 소리의 변화를 담은 노래였죠. 1980년대 들어와 제가 만든 곡의 소리, 멜로디, 가사 그리고 악기음이 1970년대의 노래와는 달랐던 거죠. 젊은 학생들이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장르를 경험하는 기분이 들어 좋아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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