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손길승 전 SK 회장 부인 박연신씨

청각장애 아들 서양화가로 키우고,13년째 장애인 잡지 만드는 아름다운 어머니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5-09-29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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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길승 전 SK 회장 부인 박연신씨
    오전에 인사동에 가본 적이 있는가. 이른 아침이 아니더라도, 오전 11시 무렵만 해도 인사동은 들뜨거나 분주하지 않다. 상점의 절반쯤은 문을 열고 영업 준비를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직 문이 닫혀 있다. 그래서 이 시각 인사동을 찾을 때면 말끔히 치장한 모습만 보던 연인의, 부스스하지만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은 얼굴을 보는 듯 가슴이 설렌다.

    인사동에 계간 ‘열린지평’ 편집실이 있다. ‘열린지평’은 장애인의 재능을 발굴하고 건전한 사회참여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1993년 전북 전주가 고향인 주부 5인이 창간한 잡지. 창간 멤버이자 현 편집인인 박연신(朴姸信·63)씨는 손길승(孫吉丞·64) 전 SK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인사동 초입에 있는 낡은 건물 2층, 작은 창밖으로 더 작은 화분들이 앙증맞게 놓인 그곳에 박연신 편집인이 있다. 하얀 나무문에 달린, 어릴 적 시골집에서 보던 동그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갑자기 상점에서나 들을 법한 벨소리가 나 주춤하고 보니 좁고 가파른 나무계단으로 막혀 있다. 고개를 들이밀고 올려다보았다. 문이 열리며 난 벨소리에 누군가 왔음을 알아차린 중년 여성이 이쪽을 내려다본다.

    “편집인 계신가요?”

    아무 말 없이 손으로 안쪽을 가리키기에 들어오라는 신호로 알고 계단을 올랐다. 책상과 탁자 하나가 겨우 놓일 만큼 좁고 천장이 낮은 게 영락없는 다락방이다. 컴퓨터 한 대 없이 책과 종이들만 어지러이 놓인 책상 앞에 그가 앉아 있었다. 집에서 대충 자른 듯한 단발머리에 수수한 옷차림, 그리고 계단참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운동화에서 그가 어떤 사람일지 힌트를 얻는다. 문을 열고 처음 본 이는 수년째 ‘열린지평’을 돕고 있는 자원봉사자였다. 막 나가려던 참이던 자원봉사자는 노란 꽃잎을 띄운 물 한 잔을 기자 앞에 놓고 떠났다.



    “조용히 일하고 싶다”

    그와 단둘이 남았다. 9월 초, 가을호 마감을 막 끝내고, 책이 인쇄되어 나오길 기다리는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다. ‘열린지평’은 두 개의 사무실을 갖고 있다. 기자가 찾은 인사동 편집실 인근에 다른 사무실이 하나 더 있다. 그곳에 3명의 직원이 있고, 인사동 편집실엔 주로 박씨 혼자 나와 있다.

    낯선 이의 방문에 경계의 눈빛을 보이던 그는 ‘기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인터뷰하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손길승 회장 얘기가 아닌, ‘열린지평’ 얘기만 하자”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어떤 구실을 내놓아도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같은 일을 겪은 듯 침착하고 완강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했다.

    “남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데 내가 매스컴에 얼굴을 내밀고 떠들 수 없다”는 게 한 가지 이유이고, “자식 키우듯 키워온 잡지인 만큼 생색내지 않고 조용히 일하고 싶다”는 게 또 다른 이유다. 그는 무엇보다 “기사가 나가봤자 장애인이나 ‘열린지평’에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인터뷰를 거부했다.

    장애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애인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걸 보면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것 같지만, ‘관람’이 아닌 ‘실천’을 요구할 때 사람들은 여전히 뒤로 물러선다는 것. 그는 “여기저기서 인터뷰도 하고, 취재도 해갔지만 그걸 보고 정기구독을 하겠다고 연락해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며 씁쓸해했다.

    ‘열린지평’ 창간 당시 장애인 잡지를 만든 전업주부들의 이야기는 여러 일간지와 방송에서 화제로 다뤘다. 한 예로 1994년 1월31일자 ‘한국일보’엔 ‘주부들이 만든 장애인 전문잡지 ‘열린지평’ 잔잔한 파문’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93년 11월 창간호에 이어 봄호를 냈는데 정기구독자가 1000명에 이르는 등 장애인의 등불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장애인들에겐 삶의 희망을 주는 대신 장애인과 비장애인들 사이에 놓인 두터운 벽을 깨고 열린 마음으로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노력이 짙게 배어 있다. 슬프고 어두운 내용보다는 밝고 긍정적인 얘기로 채워진 것도 특징이다. 다리와 발가락으로 예술혼을 불태우는 임인석 화가, 청각장애를 가졌으면서도 현대정공에 입사한 송지욱씨 등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는 장애인의 삶이 가정주부의 입장에서 그려져 있다.

    손길승 전 SK 회장 부인 박연신씨

    인사동 초입 낡은 건물 2층에 박연신씨가 만드는 장애인 잡지 ‘열린지평’ 편집실이 있다.

    ‘열린지평’은 30년 넘게 사귄 고향친구이면서 자원봉사자로 함께 일해 온 주부 5명이 흘린 땀의 결실이다. 전북 전주시의 한동네 출신이다. 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해오던 박연신(50) 조수련(50) 최선례(56) 허영배(56) 박정수(56)씨는 지난해 7월 자신들의 힘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하자며 이 이일을 선택한 것.

    편집장이자 시조시인이기도 한 박연신씨는 ‘자녀들이 다 커 가사부담이 없고 우리들의 미력한 힘이나마 생활하기 힘든 장애인들에게는 정신적인 힘이 될 것 같아 시도했다’고 했다.…”

    “회장은 회장, 나는 나”

    서울 종로구 경운동 15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국판 크기 60쪽 분량의 ‘열린지평’을 만들기 시작한 다섯 사람 중 최선례씨가 현재 발행인이고, 나머지 창간 멤버도 운영위원으로서 매달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를 한다. 그러나 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기획, 취재, 편집, 인쇄에서 발송, 회원 관리에 이르기까지 ‘열린지평’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건 박연신씨다.

    13년째 한결같이 잡지를 만들고, 장애인 복지를 위해 애쓰고 있지만 그는 창간 초기 외엔 언론에 자신을 노출한 적이 없다. 손길승씨가 1998년 SK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뒤에는 더더욱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1년 ‘한겨레 21’에서 장애인 필자에게만 원고료를 주고 비장애인 필자에게는 원고료를 주지 않는 ‘열린지평’의 운영방식, 장애인 기자들의 열의와 애환을 기사화했지만 박연신씨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발행인과 운영위원들은 대부분 여고동창인 아줌마들”이라며 “88장애인올림픽 때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이른바 선진국 장애인들의 밝은 표정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던 이들은 장애인은 온정의 대상이 아니라 연대의 대상임을 깨달았다. ‘밥해다 줄 생각 말라. 우리는 돼지가 아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우리의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절절한 육성을 듣고 나서 창간 준비에 들어가, 1993년 정기간행물로 등록시켰다”고만 씌어 있다.

    박씨가 주위 사람들에게 “회장은 회장이고, 나는 나이며 나는 손 회장의 부인이 아니라 박연신”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고 입단속을 시킨 터라 ‘열린지평’에 글을 기고하는 장애인이나 직원 대부분이 그가 대기업 회장의 부인임을 알지 못했다.

    “서점에선 한 권도 안 팔려요”

    정식 인터뷰는 아니었지만 그는 찾아온 사람을 내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열린지평’에 대한 애정과 점점 더 각박해져가는 인심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열린지평’은 여느 잡지처럼 광고료와 구독료에 의존한다. 권당 2500원이고, 1년회원은 1만원, 평생회원은 20만원이다. 이외에 잡지가 발행될 때마다 20만원씩 내는 후원회원이 있고, 1년에 10만원을 내는 찬조회원도 있다. 그는 평생회원에게 20년치 구독료만 받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줬다.

    “‘열린지평’을 자식처럼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우리가 아이를 낳아 키울 때 부모가 돌봐줘야 할 나이를 스무 살까지로 보잖아요. ‘열린지평’도 20년 정도 도와주시면 그 다음엔 알아서 잘 해나갈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평생회원에게 20만원을 받고 있어요.”

    이렇게 답지한 돈으로 잡지를 제작하고, 장애인들에게 재활비, 연구비, 활동비, 생활비 등을 지원한다. 만들어진 책은 대부분 정기구독자에게 발송하고, 일부를 서점에 배포하는데, 13년째 서점에서 책이 팔린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책의 내용이 허술하지 않을까 싶은가. 이번 가을호 목차를 살펴보자. 책 맨 앞에 실린 명사 초대석엔 손길승 회장의 죽마고우 손병두 서강대 총장이 어디서도 하지 않은 가족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안양 라자로마을을 후원하는 등 여러 봉사활동에 참여했지만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감에서 그랬을 뿐 장애인에 대해 무관심하게 지내왔는데, 시각장애를 가진 외손녀가 태어난 뒤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는 것.

    “…첫 아기라 꿈에 부풀어 여러 가지 인형도 미리 만들어 놓고, 아기 옷도 예쁘게 수를 놓아 장만해 두었던 막내딸은 너무나 낙심하여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우리 집사람도 가슴이 아파서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아기를 데리고 다니며 검사를 해보았지만 결과는 절망적일 뿐이었다. 더욱이 사위는 도무지 이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장애인 아기를 주시는가’ 하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소리를 할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

    …이때부터 나는 관심을 갖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의외로 많은 장애인이 있었고, 많은 봉사 단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이런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낸 성공 사례도 많음을 발견하게 되었다.…이런 장애인의 뒤에는 어머니나 또 다른 누군가의 특별한 헌신과 사랑이 있었고, 그것들 때문에 장애를 딛고 인간 승리를 일구어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는 사위도 딸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기를 위해 눈이 되어주고 있고, 이런 헌신을 통해 아기는 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다. …나 자신도 손녀를 바라보며 이제부터는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외에 발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히로코, 전신마비 아들을 연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시킨 이원옥씨, 장애인과 비장애인 근로자가 함께 일하는 ‘SK동해주유소’, 중증장애인들에게 차량 봉사하는 대전 ‘되살미사랑나눔봉사대’, 장애인 관련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호주 시드니 여행기, 지체장애자 주성철씨가 만든 귀금속 공예작품 지상 갤러리…. 장애인과 언제 장애인이 될지 모르는 비장애인들에게 유익한 읽을거리가 정성스럽게 담겨 있다. 사람들의 무관심이 문제다.

    “책이 남으면 자원봉사자 어머니들이 들고 나가 거리에서 팔아요. 대학이나 공원 등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나가 책 한 권 사달라고 사정하다시피 해요. 그런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요. 장애인이 TV에 나와 관심을 끌고, 장애인의 감동적인 사연들이 여기저기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막상 ‘자기 일’이 되면 사람들은 냉정해져요. 인정이 메마르고, 남의 어려운 사정에 사람들이 점점 더 무감각해져가는 것 같아요. 물론 책은 안 받아도 된다며 돈만 주겠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는 자원봉사자들이 길에 나가 책을 파는 궁극적인 목적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인들의 사는 이야기, 그들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일의 중요성, 특히 장애인에게 일할 기회는 생명수나 다름없다고 얘기하는 그는 ‘열린지평’을 통해 장애인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해왔다. 장애인에게 적극적으로 원고를 청탁하고, 비장애인에겐 원고료를 한푼도 주지 않지만 장애인 원고료는 후하게 쳐준다. 그들이 얼마나 어렵게, 얼마나 정성들여 썼을지 보지 않아도 훤하기 때문. 올초 폐쇄하기 전까지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도 장애인들에게 용역을 맡겼다. 그는 기자에게도 거듭 “나를 인터뷰할 게 아니라 장애를 딛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장애인 문인들이 쓴 시, 수필, 칼럼 등을 실어달라”고 당부했다.

    ‘홀로 사막을 걷다’

    어느덧 2시간 가까이 흘렀다. 그는 “약속이 있어 나가봐야 한다”며 기자를 달래듯 책 한 권을 건넸다. 최근 발간된 그의 수필집 ‘홀로 사막을 걷다’였다. 그는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골동품’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시조시인. 그간 ‘산목련 이야기’ ‘어머니 곁에 제가’ ‘하늘닿게 걷고 싶다’ 등의 시조집을 펴냈고, 수필집으로 ‘감꽃목걸이’가 있다. 그가 수필집을 건네며 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우리 부부와 관련된 기사에는 늘 내가 남편 외조 덕분에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이야기가 들어가요. 신춘문예 시상식 후 ‘조선일보’에서 내게 묻지도 않고 남편의 외조가 컸다고 한 것을 기자들이 계속 받아 쓰는 거죠. 사실은 남편 외조 전혀 없었어요. 일밖에 모르던 사람이라 내가 신춘문예에 작품을 낸지도 모르고 있다가 시상식 날 아침에야 당선된 걸 알았죠. 시상식장에도 5분쯤 앉아 있다 갔어요. 그런데 남편이 외조를 잘해줘 시조시인이 됐다고 나오니….”

    그렇게 헤어지고 난 며칠 뒤 인사동 편집실을 다시 찾았다. 그에게 꼭 듣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치장을 덜 끝낸, 수수한 인사동을 만날 수 있는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니 열리지 않는다. 아직 출근 전인가 싶어 머뭇거리다 편집실 바로 아래층에 있는 화랑에 들어갔다. 그를 만나러 왔다가 화랑 신세를 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위 아래층을 쓰는 이웃이라 그런지 화랑 직원이 먼저 들어와 있으라고 한 적도 있다. 화랑엔 마침 책 발송 작업을 도우러 나온 자원봉사자가 편집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동엔 크고 작은 화랑이 많다. ‘열린지평’ 바로 아래층에 있는 ‘광록화랑’은 규모가 작은 편이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의 크기가 다양하지만 대체로 작다. 그중 노랑, 빨강, 파랑 등 밝은 느낌의 원색이 많이 들어간 비슷한 분위기의 그림 여러 점이 눈에 띄었다. 붓질이 거칠면서도 형태가 단순한 게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기도 하다. 밝고 귀엽다. 화가 손영선의 작품이다.

    그림을 둘러보고 있는데 자원봉사자가 먼저 일어섰다. 그가 온 것이다. 지난번 친절하게 물을 따라줬던 자원봉사자와 함께.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자원봉사자를 보며 미안한 듯 웃음짓던 박씨가 기자를 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못 들어오게 막을까 싶어 “장애인 관련 신간을 좀 가져왔다”며 둘러대고 먼저 편집실로 들어갔다.

    장애인 잡지 만드는 진짜 이유

    혼자 쓰기에도 결코 넓지 않은 작은 공간에 막 나온 ‘열린지평’ 가을호와 봉투가 잔뜩 쌓여 있었다. 며칠째 발송을 위한 봉투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봉투에 일일이 펜으로 받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적고, 책을 담아 봉하는 발송 준비 작업에만 꼬박 일주일이 걸린다. 그나마 10년 넘게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어 일주일 만에 마무리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화랑에서 함께 기다리던 자원봉사자는 그의 여고동창생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 몇 명이 10년 넘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열일 제쳐두고 나와 작업을 거든다.

    ‘열린지평’은 이렇듯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손으로 작업이 이뤄진다. 그는 기계를 싫어한다. 편집실에 컴퓨터 한 대 없는 것도 그가 여전히 펜으로 원고를 쓰기 때문이다. 그에겐 흔한 e메일 주소도 없다. 원고지, 달력 뒷장, 편지 봉투… 여백이 있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글을 쓰고, 그것을 직원이 일일이 컴퓨터로 쳐서 작업한다.

    그는 “할 일이 많고, 비좁아 서 있을 자리도 없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말했다. 아닌게아니라 편집인과 두 명의 자원봉사자 사이에 있으려니 서 있는 것만으로 작업에 방해가 됐다. 함께 봉투작업을 하겠다고 나섰으나 그는 “하던 사람이 해야 한다”며 책을 만지지 못하게 하고, 철저히 외면했다. 한 자원봉사자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입 모양과 손짓으로 ‘얼른 가라’고, ‘화낸다’고 일러준다.

    결국 묻고 싶었던 것을 묻지 못하고, 허탈하게 사무실로 돌아와 지난번 건네받은 수필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고향 전주 이야기며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장애인을 향한 애정을 간결한 문체에 담았다. 그는 끝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지만 그가 건넨 수필집이 그를 대신해 그에 관한 많은 것을 이야기해줬다. 그가 호박죽이나 물누른밥, 풋고추와 생된장, 상추와 양념간장, 생미역과 생배추, 생선, 생두부 등 ‘자연식’ 먹을거리를 좋아하고, 20년 넘게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는 것도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수필 사이사이에 환하고 밝은 느낌의 그림들이 들어 있다. 어디선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듯하다. 책 표지 안쪽을 보니 ‘그림 손영선·서양화가’라고 씌어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들어갈 수 없던 성의 담벼락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면서 안을 훤히 들여다보게 된 듯한 느낌이었다. 손길승 전 회장의 장남 이름이 손영선임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손영선씨(37)는 청각장애인이다. 몇 해 전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관계자에게서 “손길승 회장의 부인 박연신씨가 친구들과 장애인 잡지를 만들어 장애인의 자립을 돕고 있는데, 장남이 장애인이라 장애인 가족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더라”는 말을 전해들었다. 박씨를 만나 듣고 싶었던 이야기도 알려지지 않은 아들과 아들처럼 키운 ‘열린지평’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측근이 조심스럽게 전한 바에 따르면 손영선씨는 들을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보며 대화하는 구화에 능숙해 수화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게 순탄했던 건 아니라고 한다. 아들에게 청각장애가 있음을 알게 됐을 때 손씨 부부 역시 여느 장애아의 부모처럼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장애 판정을 뒤엎고 싶어했고, 사는 동안 숱한 좌절을 맛보았다는 것. 아들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야 아들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화가로 성장하도록 독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손영선씨는 추계예술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개인전과 단체전을 여러 차례 여는 등 서양화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열린지평’ 아래층 ‘광록화랑’도 손씨의 것이다.

    그림 권하는 어머니와 아들

    박연신씨의 수필 ‘오늘 영수에게 벤자민을 선물했다’는 2000년 여름 교통사고를 당한 뒤 수십 번이나 대수술을 하고 지금도 회복이 안 돼 침대에 누워 지내는 한 청년의 이야기다. 그는 지난 5년간 한 달에 한두 번씩 그 청년을 만나 “고독한 사람이 일하고, 고독한 사람이 일한 만큼 성공한다”며 그림을 그려볼 것을 권했다고 한다.

    “지난 오년 동안 끊임없이 했던 이 말이 그의 인생에 화두가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오늘 벤자민 화분과 보이차와 삼십 호짜리 그림을 선물했다.…나는 오늘 행복하다. 영수에게 나의 귀중한 보배인 것을 선물하고 흐뭇해서다. 내일 나는 전화를 할 것이다. 그림을 시작하자고. 그리고 또 전화할 것이다. 그림을 시작하자고. ‘우리는 고독하니까 일을 하자’고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할 것이다.”

    “그림을 시작하자”고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그는 아들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너는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아들을 화가로 키워냈으리라. 그의 측근은 “손영선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며 “큰 얼굴에 가는 목, 불분명한 눈 코 입, 밝은 색상 등 동화적인 느낌, 언뜻 보아선 유치원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손영선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나도 저만큼은 그릴 수 있겠다’ ‘나도 한번 그림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림을 그린다. 사람들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목표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림 권하는 어머니와 아들, 아름다운 모자다. 아들의 예술적 재능은 손길승씨보다 어머니 박씨를 닮은 듯하다. 측근에 따르면 박씨는 그림책을 보고, 전시 관람하는 것을 좋아한다. 종종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 그의 수필 ‘수필로 쓰는 자화상’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갈증에 유달리 민감한 나의 체질은 그래서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법률가나 대학교수 같은 연구직 분야에는 공포증마저 갖기도 했다.

    이런 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내 주위 사람들은 대단한 활동가적 소질의 소유자라며 맹렬 여성이 될 거라고 기대했다. 배짱 좋고 사교술 좋고 성격 유쾌하고 인상 좋다며 내가 집 안에 무뎌 지내는 것을 무척 아쉬워하곤 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보면 배짱은 눈곱만큼도 없고, 사교술은커녕 아예 구제불능의 방안퉁수이고, 성격이 유쾌하기는커녕 늘 안개 자욱한 회색빛 그 자체였고, 성공한 그럴 듯한 여사라는 사람들은 안중에 없었다. 오직 부럽다면 예술하는 여성들이었다.

    예술은 인간 세상에 만개한 한 송이 꽃이라는 예술예찬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예술에 결박당해서 꼼짝도 못하는 어리석은 외곬은 아니었고 이왕이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도 내가 내 삶을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예술 쪽에서 자유자재하고 싶다.…”

    ‘열린지평’ 맨 뒤쪽에 여러 장에 걸쳐 3000여 명의 회원 명단이 실려 있다. 평생회원, 후원회원, 찬조회원, 1년회원. 거기 실린 이름 중에 유명 인사도 더러 있다. 평생회원 중엔 손병두 서강대 총장, 탤런트 최불암·이재룡 등이 있고, 가수 강원래는 1년에 10만원을 후원하는 찬조회원이다. 그리고 연 4회, 책이 발행될 때마다 20만원을 내는 후원회원 명단에 그의 남편과 두 아들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다. ‘손길승·손영선·손영삼.’ 결혼해 분가해서 살고 있는 둘째 아들 손영삼씨의 아기 이름도 평생회원 명단에 들어 있다.

    손길승·손영선·손영삼

    ‘샐러리맨의 우상’이던 손길승씨는 SK그룹 회장, 전경련 회장까지 지냈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손길승씨가 “기업인은 일로 평가받아야 한다”며 일이 아닌 개인이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렸기 때문.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손씨 가족은 똘똘 뭉쳐 장애인을 위한 새 지평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초, 손길승씨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가 몸담았던 SK(주), SK생명, SK텔레콤, 워커힐호텔 등 SK 계열사 전·현직 임직원들의 ‘열린지평’을 향한 도움의 손길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신현철 SK(주) 사장은 4년째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 기부금을 모아 ‘열린지평’을 돕고 있다.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 전 지인들에게 자신의 출전 소식을 알린 뒤 완주할 경우 1만원씩 후원금을 지원받아 ‘열린지평’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가족들과 지인들이 알음알음 회원 수를 늘려 명맥을 이어오던 ‘열린지평’이 지난해 최대 위기를 맞았다. 박씨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열린지평’ 제작에 도움을 주고 있는 한 인사는 “지난해 ‘열린지평’이 문을 닫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회장은 회장이고, 나는 나”라고 말해온 그이지만 2004년 1월, 손길승 전 회장이 구속 수감되자 끙끙 앓기 시작했다는 것. 평생 일만 알고 산 남편, 은퇴하면 오피스텔에서 ‘SK 성장사’를 쓰고 싶다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편집실에 나와서도 거의 매일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그해 9월, 손씨가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꼬박 8개월간 위태위태했지만 그는 ‘열린지평’을 놓지 않았다. 그의 측근은 “‘열린지평’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버티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에 기대어 계간지를 10년 넘게 이어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연신씨는 잘 버티며 독자들과 만나왔고, 앞으로도 그러기 위해 동분서주할 것이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장애인의 어머니이지 않은가. 그는 오늘도 인사동 볕이 좋은 다락방에서 ‘열린지평’에 실린 사연을 읽고 삶의 용기를 얻어 할 일을 찾고 있다는 독자의 전화 한 통, 편지 한 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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