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한국 축구에 2% 부족한 것, 킬러본능!

‘피맛’ 즐기는 ‘싸가지’ 없는 선수를 키워라!

  • 정해윤 미트라스 컨설팅 대표

    입력2005-09-29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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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축구에 2% 부족한 것, 킬러본능!
    한국 축구가 결국 국가대표 감독을 해임하는 선택을 반복하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한국 축구의 전통으로 굳은 ‘졸전 후 감독 해임’의 패턴이 이번에도 나타났다. 지도자 선임에 대한 일관성 없는 원칙과 함께 선수들의 골 결정력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흔히 축구를 가리켜 민족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스포츠라고 얘기하는데, 한국 선수의 문전 처리 미숙과 주먹구구식 축구행정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본프레레 감독이 희생양인지, 진짜 삼류 감독인지는 논외로 하고, 왜 이런 패턴이 한국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는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 문화에 내재된 문제점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한국 선수는 너무 고분고분해”

    박지성이 세계 최고 명문 팀의 하나로 꼽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을 때 국내 축구계엔 그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평소 ‘순둥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온 그가 내로라하는 세계적 킬러들과 기(氣) 싸움에서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왜 한국산 킬러는 세계적 킬러의 표준과 현저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축구계의 순둥이는 박지성만이 아니다. 히딩크는 한국팀 감독으로 부임한 초기에 우리 선수들이 운동선수답지 않게 고분고분하고 착해서 놀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한국팀의 실력을 급성장시킨 데는 감독 앞에 더없이 고분고분한 한국 선수들의 성향도 한몫 했을 것이다. 히딩크는 착한 한국 선수들에게 킬러본능이 없음을 지적하고 투쟁심을 키울 것을 주문했다. 한국에서는 어린 선수들에게 먼저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는데, 정작 스포츠 세계의 승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향을 보인다.



    ▲유아독존적 성향. 그래서 종종 팀워크를 해치기도 한다.▲눈앞의 목표에 강한 집중력을 보인다. 상대적으로 장기적 비전을 갖추는 경우는 흔치 않다.▲리스크가 높은 목표에 올인 하는 것을 즐긴다. 반면 분산투자와 같은 리스크 최소화의 방식에는 흥미가 없다.

    그런데 이런 성향의 소유자는 한국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히기 쉽다. 당연히 이런 사람을 우리의 모델로 가르치는 경우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문제는 좋건 싫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승자의 보편적인 성향이라는 점이다. 한 사회가 도덕적 이상국가를 추구하지 않는 한, 현실에 적용 가능한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성공모델 없이 이상적 모델만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도덕적 원리주의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

    킬러 못 키우는 ‘싹수론’

    이런 점에서 필자는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지 말라고 한다. 위인들의 삶이 아이들의 미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지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위인전 모델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여러 근거를 제시할 수 있지만, 여기에선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밝혀보겠다.

    최근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혐한류’라는 만화는 한 사회에서 위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얼마나 상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일본 우익의 시각을 반영한 이 만화는 안중근 의사를 멍청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물론 그가 일본 위인전 속의 주인공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악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다를 건너 한국 땅에 이르게 되면 이토 히로부미는 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린 침략의 원흉이 되고, 테러리스트 안중근은 의사(義士)로서 존경받는다. 아마도 많은 한국인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일본인의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위인전이란 어느 나라,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역사적 인물에 대해 조작된 이미지를 유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위인전의 주인공은 대체로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무결점의 인물로 묘사되는데, 우리가 이런 신화에 매몰될 경우 필연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 바로 ‘싹수론’이다. 한마디로 위대한 인물은 떡잎 시절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품성론에 해당하는데, 만일 한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이런 식의 인물관을 가지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선택되는 지도자, 선수, 신입사원은 자신이 맡아야 할 본질적인 역량보다 무결점의 과거 기록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한국 축구에 2% 부족한 것, 킬러본능!
    하지만 학교 우등생이 사회에서는 열등생이라는 우리 사회의 속설은 이런 싹수론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보여준다. 학창시절 부모와 스승의 말에 고분고분하고 학생의 본분에 충실했던 젊은이들이 왜 사회의 거목으로 자라지 못하는가.

    우리가 스포츠의 세계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곳은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이 지배하는 무대가 아니다. 그곳은 인간관계의 물리학적 법칙이 정확히 작동하는 곳이며, 탁월한 선수를 키워낸 지도자의 성공사례는 인간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교정한 진정한 리더십의 모범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통하는 방식이라면 기업과 사회 곳곳에 응용할 수도 있다.

    앞서 제시한 킬러의 조건을 놓고 한국 스포츠 선수들과 비교해보자.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성향의 선수를 쉽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킬러의 성향을 소유한 선수라면 지도자들에게 일찌감치 기를 꺾고 길들여야 할 대상으로 찍히기 십상이다. 사회적으로 성공모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어 평범한 인재만 키워내는 것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 총장은 올해 초, 취임 6개월을 맞아 한 인터뷰에서 ‘한국 과학도의 킬러본능 부재’를 크게 질타했다. 그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이나 중국 학생과 비교하며 “한국의 과학도가 과학자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잔혹할 정도의 공격적 성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 경쟁을 회피하는 문화적 풍토를 들었다.

    육식동물의 공격 본능

    러플린 총장의 언급은 의미심장하다. 킬러본능이란 것이 축구선수에게 필요한 센스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범용적인 성공의 원형질로 인식해야 한다. 이는 또한 한국 축구가 작금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축구협회의 임원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킬러의 거세는 우리 문화 속에 내재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킬러본능이 가진 원래의 의미를 파악해봄으로써 한국사회의 인재관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영어에서 ‘킬러 인스팅크트(Killer Instinct)’는 주로 육식동물이 사냥할 때 보여주는 공격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이것은 냉혹하고, 집요하며, 더없이 공격적인 정신자세다. 작은 고양이과 동물이 자신보다 덩치 큰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데서 보듯 이것은 육체를 초월하여 승리를 이끄는 심리상태다.

    스포츠 세계에서 킬러본능이란 격투기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지적재산권은 아마 전설적인 액션스타이자 무술인이던 브루스 리(이소룡)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할리우드를 제패한 액션스타이지만, 북미 지역에서는 탁월했던 무술인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인은 브루스 리를 현실세계에 존재했던 진정한 슈퍼맨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가 정말로 그렇게 위대한 싸움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당대 무술인이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파괴한 일종의 사상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10대 후반까지 홍콩의 불량소년이었다. 대단히 다혈질적인 기질을 타고난 그는 실용적인 싸움기술을 찾아 이 도장, 저 도장을 기웃거렸다.

    18세에 실용주의 정신이 지배하는 젊은 대륙 미국에 도착한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어린 나이에 자신의 도장을 열었다. 당시 그는 중국 무술 사범들에게 이어져온 폐쇄적 전통과 과감하게 절연한다. 외국인에게도 무술 수련을 허락한 것과 형(품세)의 수련을 없앤 것.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전통을 답습하는 무술인들에게서 강렬한 반발을 사게 된다.

    그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중국 전통무술과 서양의 복싱, 한국과 일본의 여러 무술을 혼합한 ‘절권도’라는 자신만의 무술을 창시하기에 이른다. 절권도는 그야말로 ‘퓨전 무술’이었으며, 전통무술의 정수만을 혼합한 실용적 격투기였다. 그때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절권도 철학의 정수처럼 강조한 것이 바로 ‘킬러 인스팅크트’이다. 킬러본능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전통적인 무사정신과 차이가 있다.

    무술은 총기의 발명으로 사실상 실용적인 생명을 다했다. 그후 무술은 한 민족의 전통문화로서, 혹은 건강체조로서, 문화적 유산으로서, 인격 도야의 수단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브루스 리는 본질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한 무술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통적인 수련방식 대신 철저하게 승부에 집착하는 본질을 추구했던 것이다.

    탁월한 킬러본능의 모범을 보인 브루스 리는 킬러가 숙명적으로 만나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전통이란 이름의 괴물로부터 온 도전장이었다. 그가 30대 초반, 절정의 순간에 요절했을 때 그의 죽음을 두고 숱한 음모론이 나돈 것도 그가 전통무술계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킬러가 가장 싸우기 힘든 도전은 전통과 기성집단의 반발이다.

    브루스 리가 갈파한 전인교육론의 허구성은 킬러본능의 본고향인 격투기 시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종격투기 선수의 꿈의 무대는 일본이다. 그런데 무사도의 본고장이자 경제대국인 일본은 무규칙의 룰로 진행되는 시합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전통적인 전인교육 시스템인 유도 때문이다. 브라질 유술이나 삼보 같은 신종 무술과 비교하면 유도의 효율성은 두드러지게 떨어진다.

    38초 만에 무너진 한국 유도인

    지난 4월 개최된 세계 최고의 격투기시합인 프라이드 미들급 개막전에는 한국의 유도 천재 윤동식이 참가했다. 그는 올림픽에서만큼은 인연이 없어 ‘비운의 유도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선수이지만, 한국의 엘리트 체육코스를 밟은 정통 무도인이다. 그의 상대는 한때 일본의 영웅이던 노장 프로 레슬러 사쿠라바 가즈시. 과거 식민지 국가의 유도선수와 유도 종주국의 프로 레슬러가 맞붙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 시합은 불과 38초 만에 사쿠라바 선수의 KO승으로 끝났다. 제한적인 유도의 룰에만 익숙한 윤동식은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펀치에 당황했고, 마치 거북처럼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했는데 그를 향해 숱하게 날아드는 사쿠라바의 펀치와 발길질을 레프리가 중단시키며 어이없이 시합이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전상황의 부적응은 비단 윤동식만 겪은 것이 아니다. 동양의 전통 무도 선수들이 룰이 없는 시합에서 비슷한 결과를 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전통적인 무술 시스템은 안면을 향한 펀치를 두려워하는 무도가를 양산한다는 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세례를 받아 고슴도치가 되어서도 적군과의 교전에서 스스로를 완전 연소시킨 무사들의 얘기는 많이 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 동양 전통의 무술 시스템이 이런 전사를 양성해낼 수 있을까.

    도(道)에서 술(術)로 전환

    무술이건 무도이건 간에 그것이 요가와 구분되는 것은 격투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을 때 가능하다. 뜬구름 잡는 인격 수련과 전통의 학습은 싸움을 못하는 무사, 골을 넣지 못하는 스트라이커, 실적이 낮은 회사원 등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간을 양산한다.

    그러면 동양 스포츠의 대표로 군림하는 무도가 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됐는지 살펴보자. 사실 동양의 무도는 우리가 전통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달리 근대의 조작된 역사에 불과하다. 일본의 전통 검술과 유술이 각각 ‘검도’와 ‘유도’로 전환된 것은 1879년과 1882년의 일이다. 이를 필두로 동양무술은 대부분 ‘…도’라는 식으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지난 한 세기 동안 동양 무술의 가장 큰 변화는 ‘술(術)’에서 ‘도(道)’로의 전환이었다.

    그런데 그 직전의 일본 역사에서 눈 여겨봐야 할 부분이 1878년의 ‘폐도령’이다. 오늘날 일본이 자랑하는 정신문명인 무도는 사무라이가 더는 칼을 찰 수 없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그들은 사무라이의 전통에서 멀어져가는 세대에게 옛 무사의 정신을 가르치고자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냈다. 실제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와 같은 인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사가 아니라 조선의 선비와 같은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이런 인물에 의해서 조작된 ‘고수’의 이미지가 생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무사도는 일본인마저 걸려든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술의 달인을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인식하기 쉽다. 평상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가 느닷없는 적의 공격에 대해서는 더 없이 냉혹한 킬러로 변모하는 모습, 그러나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최근 이종격투기에서 가장 강세를 보이고 있는 명문 체육관 중 하나인 브라질의 슈트복스 아카데미는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공격적인 사람이 승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의 주특기는 넘어진 상대의 얼굴을 짓밟는 것이며, 일어서는 상대의 안면을 향해 발길질을 날리는 것이다. 이런 광포함에 사무라이의 후예들은 연전연패하고 있다. 허상이 아닌 본질을 추구한 결과 브라질은 축구에 이어 이종격투기에서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종격투기 무대에서 최근의 대세는 다시 ‘도(道)’에서 ‘술(術)’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브라질 선수들이 개량한 ‘유술’이 유도와 벌인 대결에서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 축구계에서 킬러를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런 문화적 원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 축구는 한국과 또 다른 면에서 킬러의 부재에 속을 태우고 있다. 1993년 J리그가 시작되고부터 일본 축구의 수준이 급상승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일본 축구가 세계적 킬러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일본에서 벌어진 2003년 동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한국에 우승컵을 넘긴 일본의 지코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일본 선수도 한국 선수처럼 찬스가 생기면 과감하게 슈팅을 날릴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 선수들이 끊임없이 ‘똥볼’을 차대는 것과 달리 일본 선수들은 슈팅 자체를 여간해선 시도하지 않는다는 문제제기였다.

    본프레레 감독 해임의 결정적 계기가 된 2005년 동아시아 선수권대회 한일전의 통계를 보면 이러한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0대 1로 한국이 패한 이 경기에서 한국은 18개의 슈팅을 날렸다. 반면 일본은 한국에 비해 찬스를 잘 살렸다. 전후반을 통틀어 5번의 슈팅만을 날렸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골로 연결된 것이다. 단순한 통계로만 보자면 성공률 20%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후반 90분 동안 일본이 만든 찬스가 겨우 5번밖에 안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염치를 알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친 일본 무사도의 결과다. 한국 스포츠 신문에서도 ‘똥볼’을 찬 스트라이커에게 골 욕심을 부린다고 점잖게 나무라는 기사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왜 동료에게 양보하고 합심해서 더 좋은 찬스를 살리지 못했냐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동아시아의 집단주의적인 행태가 킬러 부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동아시아에서 걸출한 스트라이커의 출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강팀에 강하고, 약팀에 약한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의 재목은 한없이 골 욕심으로 가득 찬 선수여야 한다. 이런 원초적 욕망에 대해서 사회는 관대해야 한다. 야구에서 최고의 타자가 기껏 3할대의 타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스트라이커의 헛발질 또한 관용과 이해의 대상이다. 사실 이것은 한국 축구의 장점이기도 하다. 축구 행정은 일본에 뒤졌어도 사회적 비난을 두려워 않고 과감하게 골 욕심을 부리는 선수들의 근성 때문에 한국은 여태 동아시아 축구의 맹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가 선수들의 정신력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또 한 가지 있다. 이것은 킬러본능의 정의와 상당히 배치되는 면이기도 한데, 아쉽게도 이 그릇된 생각이 한국 체육계의 전통으로 답습되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서 고양이와 쥐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양쪽 모두 강렬한 투쟁심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쥐와 고양이는 전혀 다른 형태의 투쟁심을 발동한다. 고양이는 가학적이고 공격적인 투쟁심을 발휘한다. 반면 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생존을 위한 최후의 투쟁심을 발휘한다. 이 상황에서 과연 오늘날 스포츠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킬러본능은 어느 쪽의 심리상태를 가리키는 말일까. 그 답은 두말할 나위 없이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심리상태다. 그것은 더없이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심리상태로 최후의 발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히딩크가 남긴 교훈 가운데 우리가 가장 먼저 잊어버린 것이 ‘즐기는 축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심정으로 그라운드에서 상대를 요리해야 한다. 그것은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열정에 타오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의 열정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예의 그 지도자 타령만 해왔다. 우리가 찾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란 선수들의 열정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한국 체육계에서 전통적으로 선수에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의 심리상태만을 강조해온 것은 근대의 역사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축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식 스포츠가 조선반도에 들어오던 무렵은 조선이 외세에 침탈당하던 시기였다. 당시 스포츠는 식민지 청년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공정한 경쟁의 장이었고, 침략자를 통쾌하게 쓰러뜨릴 수 있는 무대였다.

    해방이 되어서도 이러한 약소국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일본에 지거든 현해탄을 건너지 말라”고 했다. 이 발언은 한국 체육계, 특히 축구계의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가 강렬한 극일(克日) 감정임을 보여준다.

    외국인 축구감독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점이 한국 국민의 프로축구 리그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런데 국가 대항전이 되고, 특히 숙적 일본과 맞붙게 되면 전 국민이 광분에 가까운 응원을 보낸다. 여전히 우리는 독립전쟁을 수행 중이며 축구는 역사적 가해자에 대한 응징의 수단이다. 당연히 국가대표 축구선수에게 지난날 광복군과 같은 비장한 정신을 요구하게 된다.

    승자들의 이중적 인생

    이것은 같은 구기종목인 한국 남자 농구선수와 비교해보면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국 남자 국가대표 농구선수는 흡사 중국의 축구선수를 연상케 한다. 자국에서는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니는 왕자들이지만 국가 대항전에서는 졸전을 면치 못한다. 게다가 실력에 비해 과분한 대우는 그들의 기강을 해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만일 같은 행동을 축구대표선수들이 했다면 국민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강팀을 만나면 펄펄 날고, 약팀을 만나면 같이 약해지는 한국 축구의 미스터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인간의 정신과학을 다루는 학문에서는 인간의 두뇌가 컴퓨터와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즉 컴퓨터가 소프트웨어에 의해 일정한 방식으로만 작동하듯 인간의 두뇌도 프로그래밍 된 방식대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지난 8월11일 동아시아 대회에서 꼴찌를 한 후 본프레레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여론이 드높던 시점에 정경호 선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약팀과 하는 경기보다는 전력이 비슷한 팀이나 강한 팀과의 경기에서 더욱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한국 선수들에게 프로그래밍 된 정신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 선수는 강팀을 만나야 마음이 편하다. 반면 상대적으로 약한 팀을 만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이것은 그들에게 늘 배수진의 정신상태, 궁지에 몰린 쥐와도 같은 심리상태를 강조해온 결과다. 진정한 킬러라면 약팀을 만났을 때 더없이 잔인해져야 한다. ‘피맛’을 아는 킬러처럼 스트라이커는 ‘골맛’을 알아야 하며, 끝없이 탐욕을 부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도 사냥에 나선 적이 없는 맹수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수진의 정신상태가 가져오는 좋지 않은 결과는, 선수의 시야를 좁히고 로봇처럼 창의성 없는 축구를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때는 도망가는 쥐의 퇴로를 한 발 앞서 가로막는다. 이것이 킬러의 단계에서 가질 수 있는 시야다.

    반면 궁지에 몰린 쥐는 번번이 수를 읽히고 퇴로를 차단당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홍콩을 제외한 단일 국가 국민 중 IQ가 가장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이 머리 좋은 민족에서 머리 나쁜 선수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라운드가 선수의 놀이터가 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학원 스포츠 지도자가 어린 선수를 구타하는 행위는 철저히 금해야 한다. 그들이 처음 축구화 끈을 매고 유니폼을 입던 그날처럼 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라운드에 설 수 있게 해줘야만 킬러가 탄생할 수 있다.

    킬러본능의 강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먼저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는 품성론이 문제가 된다면, 기능주의적 인간만 양산해도 괜찮겠냐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킬러의 일반적인 성향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비판적 시각으로 본다면 많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인간에게서 균형 있는 인격을 요구하는 전인교육의 중요성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스포츠 세계를 벗어나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가 젊은 인재를 양성하면서 범하는 오류는 인생의 전반전을 살고 있는 선수에게 압축적으로 인격적 완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 사람의 도덕적 품성을 강조한 것이기보다는 산업화 시기에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인재관(觀)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둥글둥글하게 모나지 않고 튀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이 필요하던 시기의 사회적 요구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승자의 모습을 보자. 그들은 인생을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살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인생의 전반기를 현실세계에서 실질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후반기는 사회적 공헌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다는데 있다. 오늘날 한국인이 국내 기업인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서구의 기업가는 공통적으로 ‘스크루지 패턴’을 보인다.

    세상을 자기중심에서 보라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이 이분법적 삶의 가장 훌륭한 사례다. 그는 자신의 인생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기업가의 일생은 부를 쌓는 시기와 이를 사회에 환원하는 시기로 나뉜다. 부자로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의 인생 전반기는 회개하지 않은 시절의 스크루지였다.

    가장 공격적인 맹수가 먹이사슬의 정점을 차지하듯 최고의 스트라이커는 누구보다 골 욕심을 내야 하며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에게는 남다른 권력욕이 필수적인 요소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성공의 동인(動因)에 대해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 실체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 넘치기 시작한 경영학, 동기부여 서적들은 사회적 성공과 부에 대해서 근거 없는 착시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위대한 기업’이라는 현대판 신화를 만들어낸 짐 콜린스는 그의 책을 매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려놓았지만, 정작 그가 사례로 든 위대한 기업은 책이 출간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타리, 치즈브로-폰즈, 데이터 제너럴 등이 그랬다. 현대 경영학이 만들어낸 ‘기업가 정신’이란 용어도 마찬가지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것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이 가지는 선구자 정신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정작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꼽은 최고의 기업가 정신의 소유자들은 다름 아닌 한국의 기업가다.

    우리는 여전히 파랑새를 좇는 어린아이와 같다. 아주 멀리 어딘가에서 아름다운 삶의 모델을 찾아왔지만, 정작 지난 반세기 한국 근대화의 주역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성공모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소유욕, 끝을 보고야 마는 승부근성,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보는 세계관. 이 모든 것이 한 개인과 조직을 성공으로 이끄는 기본적인 바탕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인생의 후반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인생의 전반기를 사는 사람에게 엉뚱한 기준을 적용하듯 인생의 후반기를 사는 사람에게도 그릇된 기준을 적용할 확률이 높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이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의 손으로 뽑아놓은 임기 5년의 단임제 대통령에 대고 취임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뽑아준 걸 후회한다”는 소리를 곧잘 한다. 이런 상황에서 삼류 감독을 선임하고 경질을 되풀이하는 대한축구협회를 비난하는 것도 좀 떳떳치 못한 처사일 것이다.

    인생의 전반기를 살아가는 자세가 킬러의 단계라면 인생의 후반기는 리더의 단계로 진화해 나가는 단계다. 스포츠맨이 젊어서는 선수로 활동하고 은퇴 후에 지도자의 길을 걷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스타플레이어 출신 가운데 지도자로 성공한 이가 드물다는 스포츠계의 속설은 이 두 단계에서 요구되는 자질이 전혀 다른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박주영과 차범근의 실수

    사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의 성향은 바로 이 단계에서 필요하다. 장기적 비전과 탁월한 리더십, 조직원에 대한 헌신이 이런 자질에 해당한다. 우리는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에 대표적인 두 인물의 사례를 비교해봄으로써 선수의 단계와 지도자의 단계에 요구되는 자질이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한국 축구가 낳은 불세출의 영웅 차범근과 떠오르는 축구천재 박주영에게는 축구 외의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정신을 다스리는 종교가 개신교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종교로 인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박주영의 경우 독특한 골 세리머니가 이단 교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시비가 있었다. 개신교 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선 한국에서 골 세리머니를 기도로 대체하는 선수는 여럿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박주영의 세리머니는 확실히 강렬한 편인데, 이런 문제에 대해 팬들이 보여야 할 자세는 단호하다. 선수의 경우 자신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선 그것이 반인륜적인 것이 아닌 한 어떠한 것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탈리아 축구의 대표선수였던 로베르토 바지오는 원조 가톨릭 국가에서 불교신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가 선수생활을 하는 데 종교가 장애가 됐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더구나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성실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어린 선수에게 그만한 일로 상처를 내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러나 감독의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1997년 프랑스월드컵 예선을 치를 당시 한국대표팀을 진두지휘하던 감독 차범근은 선수의 승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리는 발언을 했다. 당시 도올 김용옥과 일간지를 통해 한 차례 설전을 주고받기까지 했던 그는 유럽 축구감독의 사례를 들며 지도자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투덜대는 리더에게 익숙해졌는데, 이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그만한 스트레스도 감당할 배짱이 없다면 리더의 자리를 맡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감독에게만큼 선수와는 다른 윤리관을 적용해야 한다. 차범근은 독실한 신자이며 모범적인 스포츠인이지만, 리더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 실수를 범했다. 선수들 가운데 독실한 불교신도가 있다면 감독으로서 그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그에게 열렬한 성원을 아끼지 않은 타종교인의 허망함은 또 어떻게 달래줄 것인가.

    ‘돌아온 탕아’를 기다리며

    필자는 앞서 오늘날 존경받는 서구 기업가 대부분이 스크루지 패턴을 보인다고 언급했다. 스크루지는 물론 생의 대부분을 탐욕과 인색함으로 보냈다. 아마도 그가 회개하고 새 삶을 산 기간은 극히 짧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성경의 일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돌아온 탕아의 일화를 통해서다. 누가복음 15장의 이 유명한 이야기는 각각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을 상징한다.

    집안을 지킨 착한 아들은 보험과 같은 존재다. 그가 있기에 집안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는 현상유지밖에 없다. 고향땅을 떠나본 적이 단 한번도 없고, 오로지 아버지만을 스승으로 모신 그에게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돌아온 탕아는 집안의 투자자산과 같다. 그야말로 현대 자본주의가 그토록 강조하는 기업가 정신의 투철한 소유자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고정관념을 거부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집을 나섰다. 비록 젊은 나이에 한번의 실패는 맛보았으나 넓은세상을 보고 견문을 익히고 돌아온 그야말로 집안을 일으킬 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탕아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지혜다. 그는 현명한 리더의 상징이다. 탕아가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인 것은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중용해야 할 인물이 누구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인은 어느 나라 못지않은 완고한 도덕적 전통이 있지만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데 도덕적 결벽증은 없다. 그들의 영웅 만들기 전통은 역사적 인물의 치부를 덮어주기와 다름없다. 그들이 만일 우리와 같은 엄격한 도덕적 잣대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해왔다면 러시모어 산의 ‘큰바위 얼굴’들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5000년 역사에서 지난 반세기만큼 탁월한 킬러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도 흔치 않을 것이다. 히딩크는 비록 우리 선수들을 가리켜 킬러본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지만, 대한민국의 현대사야말로 킬러의 단계에서 리더의 단계까지 가장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실천한 모범적인 사례다.

    우리는 대문을 열어놓고 언제라도 길 떠난 아들을 맞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한번 길 떠났기에 견문을 더욱 넓히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까지 사무치게 간직한 그들을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곳간에 곡식이 넘치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탁월한 킬러들의 출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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