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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 김기정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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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신동아 200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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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정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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