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전쟁 속의 여성

‘성폭력 피해자’ ‘잔혹한 전사’ ‘자살 테러범’의 세 얼굴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전쟁 속의 여성

4/5
난민수용소 여성의 고난

내전에 휘말린 여성들은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때로는 몸을 빼앗기면서도 집에 재워주고 밥을 차려줘야 한다. 부족한 식량을 그들에게 바친다는 것은 두 가지 위험을 뜻한다. 하나는 그녀가 돌보는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의 굶주림, 다른 하나는 적군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언젠가 아군에게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다.

1980년대 내전을 겪은 엘살바도르의 한 여성이 국제적십자사 요원에게 털어놓은 하소연은 절박하기만 하다.

“게릴라들에게 밥을 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난폭해졌다. 정부군에게 밥을 해주지 않으면 그들도 난폭해졌다. 우리는 양쪽 모두에게 협력자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전쟁은 대량 난민을 낳는다. 난민수용소는 현대전이 그려내는 우울한 초상화 가운데 하나다. 난민촌에 들어서면, 우리는 그곳 사람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 노인임을 알게 된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자료에 따르면, 난민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의 비율이 75%에 이르며, 어떤 경우엔 90%에 이른다. 많은 성인 남성이 군에 징집되거나, 전선에서 죽임을 당했기에 수용소 안에서 남성 비율은 그만큼 줄어든다. 필자가 시에라리온 난민수용소나 발칸반도의 코소보와 보스니아 난민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도 남자보다 부녀자가 많았다.



난민수용소는 결코 여성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다.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지배하는 밀림의 법칙이 통하는 곳이 난민수용소다. 전란을 피해 수용소로 오기까지 온갖 고초를 겪은 여성들은 수용소 안에서 또 다른 전쟁의 공포를 겪기 십상이다. 많은 경우 난민수용소 여성들은 그곳을 지배하는 무뢰한들의 성폭력에 희생당한다. 그 혼란 속의 눈물과 희생은 고스란히 약자인 여성들의 몫이다. 르완다 내전 당시 투치족의 공세에 밀려 이웃 콩고로 도망간 후투족이 세운 난민촌이 그러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동티모르의 투쟁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때다. 호주군을 선두로 한 유엔평화유지군이 들이닥치자 10만이 넘는 동티모르 난민들이 인도네시아를 지지하는 민병대의 협박과 속임수로 서티모르로 강제 이주당한 적이 있다. 그 무렵 서티모르에 세워진 난민수용소는 국제사회의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는 틈을 타 강간범죄가 날마다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그곳 난민수용소는 유엔 난민구호기관인 UNHCR 관계자들도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동티모르 현지 취재 때 서티모르에서 막 빠져나온 난민들을 만났다. 그들은 “인도네시아를 지지해 방화와 살육을 저질렀던 민병대원들은 우리가 동티모르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면 ‘죽이겠다’며 폭력을 휘둘렀다”고 전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운이 좋아 보였다. UNHCR은 난민 여성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국제법에 따라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해놓았으나, 서티모르 난민수용소처럼 밀림의 법칙만이 통하는 곳에서 규범이 지켜지길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평화 유지에서 높아지는 여성 비중

전쟁에서 여성의 역할이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 부차적 역할을 맡는다. 간호사로 부상병을 돌보거나, 후방 군수공장에서 탄약을 만드는 일 따위다. 아직도 국제정치는 남성 위주로 돌아간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전선에서 싸우는 일도,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협상과정에서도 여성의 얼굴을 보기는 어렵다.

보스니아 내전을 끝장낸 데이튼 평화협상(1995. 12.) 과정에서도 여성은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쪽엔 약 40개의 여성단체가 조직돼 있었지만, 그들에겐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캄보디아, 동티모르, 소말리아, 라이베리아 등 1990년대 지구촌 곳곳에서 빚어진 분쟁을 끝내는 협상과정에서 여성은 배제됐다. 다만 남미 과테말라, 아프리카 부룬디의 내전에서는 공식 평화협상 석상에 여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서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들은 평화협상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안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 한 보기로, 벨기에 정부와 국제아동기금(UNICEF)은 여성들이 나서서 아프리카의 분쟁지역에서 반군이나 정부군 쪽에 붙잡혀 있는 소년병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들이 풀려나는 데 힘쓰는 역할을 제안한 바 있다. 2000년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여성과 평화안보에 관한 1차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평화협상에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담고 있다. 여성이 협상에 참여함으로써 평화 분위기를 쉽게 띄울 수 있다는 논리다.

전세계적으로 군에서 여성의 비율은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이는 군의 역할 변화와도 관련된다. 지난날 군 병력은 전쟁을 벌이는 인력을 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인력으로 개념이 바뀌었다. 전투부대로서가 아니라 평화유지군으로서의 군 개념은 여성의 역할을 더 확대할 수 있다. 지금 유엔이 파견한 유엔평화유지군에는 많은 여성 병력이 포함돼 있다. 이들 여성은 분쟁지역의 선거 감시, 충돌 예방 순찰 등의 임무를 수행해왔다. 지구촌에서 여성이 평화 임무를 더욱 많이 맡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4/5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목록 닫기

전쟁 속의 여성

댓글 창 닫기

2021/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