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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학생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체험일기

섬뜩한 비바람 굉음 속, 귀마개 나눠주며 “죽어도 같이, 살아도 같이…”

  • 한은정 미국 사우스앨라배마주립대 석사과정·커뮤니케이션

한국 유학생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체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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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모빌도 다운타운 쪽은(다운타운이 있는 동쪽은 해안 저지대이고, 공항 및 내가 다니는 학교가 있는 서쪽은 고지대다) 주요 도로 및 관공서, 주택 일부가 물에 잠겼다. 영주 엄마는 “그래도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며 “모빌은 은혜 받은 땅이라 매번 태풍이 비껴간다”고 했다. 20년 전에 엄청난 태풍이 와서 도시 전체가 마비됐던 거말고는 지금까지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반면 카지노가 주산업인 미시시피주 빌럭시나 퇴폐 유흥업소가 많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는 저주받은 도시라서 이번에 큰 피해를 본 거라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카트리나가 모빌 지역을 비껴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갑자기 안심이 되었는지 영주 아빠와 영주 남편은 우비를 입고 바깥으로 나가 별 피해가 없는지 집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와 수진이도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있느라 답답하던 차에 운동도 할 겸 밖으로 나가 동네를 살폈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특히 바람이 너무 세서 걷기가 힘들었다. 휘청휘청 날아갈 것만 같았다.

다행히 영주 부모님댁과 영주네 집은 앞마당에 있는 키 작은 나무들만 뽑히고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집들을 보니 울타리랑 지붕이 군데군데 날아가고 없었고 도로엔 크고 작은 나무둥치와 전선이 뒤섞여 널브러져 있었다. 신호등도 모두 고장나 있었다. 영주 말로는 도로에 있는 전선을 다 치우고, 새로 가설하고, 신호등 복구하고 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했다. 그 말은 전기가 다시 들어오려면 일주일은 걸릴 거라는 얘기였다.

▼ 8월30일 화요일

‘윙윙윙, 징징징….’



뭔지 모를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이게 뭔 소리지? 혹시 ‘카트리나’가 아직 안 지나갔나? 불안한 마음에 밖을 내다보니 영주의 남편이랑 아빠가 창문과 현관문에 둘러친 널빤지를 제거하는 소리였다. ‘카트리나’가 완전히 지나갔나 보다. 하늘을 보니 언제 심술을 부렸냐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한 아침이었다. 이웃주민도 나와서 열심히 널빤지를 뜯고, 지붕에 올라가 새는 곳을 막고, 부서진 울타리를 고치고, 집 주변에 널린 나뭇가지를 치우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웃는 얼굴이었다. 어쩌다 나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꼭 “굿모닝” 하면서 인사까지 했다. 엄청난 자연재해로 이런저런 피해를 당하고 복구 중인 불쌍한 사람들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밝은 얼굴이었다. 자신감인지, 여유로움인지 난 그들의 긍정적인 태도가 부럽고, 또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전기 끊기니 숯 사재기

에어컨 대신(여전히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선풍기 하나 달랑 켜놓고 다같이 아침을 먹었다. 영주랑 영주 남편은 가게가 무사한지 점검하러 나갔고, 나랑 수진이도 짐을 챙겨 나섰다. 시동을 걸고 보니 기름이 얼마 없었다. 수진이가 “태풍 지나가고 나면 기름값이 엄청 오를 텐데 왜 미리미리 기름을 가득 채워놓지 않았냐”며 나무랐다. 아니나다를까. 도로 주변에 있는 주유소들이 거의 다 폭삭 망가졌다. 이를 어쩌나, 진작 기름 넣을 걸, 후회막급이었다.

도로 상황은 어제와 똑같았다. 조심조심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에서 뭔가 타는 듯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나더니 도로 한가운데 갑자기 멈춰섰다. 우선 급한 대로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라도 옮겨놓으려 했지만 시동 자체가 걸리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로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운전자들이 차례차례 멈춰서 나한테 왔다. 난 한국의 험악한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도로 한가운데 멈춰서 운전을 방해하니깐 나한테 삿대질하러 오는구나 했다.

그런데 웬걸, 다들 나한테 “무슨 일이냐, 괜찮냐, 도로 한가운데 이렇게 서 있으면 다른 차들이 당신을 치고 갈 수도 있다, 우린 괜찮은데 네가 위험하다, 내가 도와주겠다”며 내 차를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그냥 무작정 밀어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예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 살피기도 했다. 어떤 이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진정하라”며 차가운 얼음물을 주고 가고, 어떤 이는 “우리 집이 바로 저기 길 건너편이니 혹시라도 저녁때까지 못 고치면 즉시 찾아오라”며 자기 집 전화번호를 주고 갔다.

결국 아무도 내 차를 고치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 그만 놀랐다. 사실 그들 모두 ‘카트리나’ 때문에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또 복구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여유를 잃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뒤늦게 현장으로 달려온 영주 말로는 “이 동네는 재난을 당하고 나면 사람들이 서로 불쌍하게 여기면서 인심이 더 후해진다”고 했다. 정말 본받고 싶은 문화다. 어쨌든 고맙게도 지나가던 한 트럭 운전자가 견인장비를 빌려줘서 일단 차를 가장 가까운 주차장에 끌어다 놓았다. 어차피 한동안은 정비소도 문을 못 열기 때문에 고칠 수 없을 테니 그냥 놔두기로 했다.

우린 영주 차를 타고 학교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 언뜻 보니 홈디포 앞에 엄청난 인파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체 발전기를 가동했는지 홈디포가 벌써 문을 열었다. 영주 말로는 가정용 발전기나 전기 없이 숯으로 바비큐요리를 해먹을 수 있는 그릴을 사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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