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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이주영 교수의 진보 역사학계 비판

민중-통일사학은 이데올로기 없는 허상, ‘자유주의 사학’이 유일한 대안

  • 이주영 건국대 교수·사학 jylee@konkuk.ac.kr

이주영 교수의 진보 역사학계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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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만열 교수는 “한국현대사는 분단이 고착화된 역사이자, 이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하려는 투쟁의 역사였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의미를 둔 부분은 정부보다는 민간인 사이에서 일어난 통일운동이다. 때문에 그는 1950년대 자유당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대항해 평화통일론을 내세운 김낙중과 조봉암의 노력과 4·19혁명 당시 남북교류와 판문점 학생회담을 추진한 혁명대열의 학생들을 높이 평가했다. 이들이야말로 분단 국가주의를 통일 민족주의로 바꾸어놓은 주역이라는 것.

이 교수는 이처럼 ‘진정한 민주적 통일운동’이 평화통일운동,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으로 이어지면서 민족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분석한다. 이런 흐름은 다시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민족·자주적 통일운동이 대중화되는 단계로 접어들도록 이끌었다는 게 이 교수의 시각이다.

이 교수는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와 자주화 그리고 민족 통일이 별개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집약된 운동이었고, 그것은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으로 결실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개신교의 진보적인 연합단체인 한국교회협의회(NCC)가 1988년에 미군 철수와 외세 배제에 대한 요구가 포함된 ‘통일선언’을 발표하고, 그에 따라 1990년대에 교회가 북한돕기운동을 주도한 데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에 대해서도 통일운동을 민중 속으로 확산시킴으로써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상과제로 올려놓은 공로가 있다고 인정했다.

원로사학자 3인의 잘못된 인식



하지만 이들 원로교수 3인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하나는 ‘실제 일어난 일’을 기술하는 기본원칙에서 크게 벗어나 역사학을 명분과 희망, 염원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 위에 올려놨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학은 아무 쓸모없는 비현실적인 것이 될 위험성이 크고, 자칫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영역에서 희망을 찾는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현재 통일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의 대상일 뿐인데 그것을 향후 역사 연구의 초점으로 삼는다면 ‘실제 일어난 일’을 연구자의 희망에 따라 곡해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통일의 가능성을 찾는 데 집착하다 보니 해방 직후의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그러한 과대평가는 그들의 의견에 따랐더라면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운 감정으로 남는 것이다. 오늘날 김구, 김규식, 여운형 같은 중도적 인물이 추앙받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역사 인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실제 일어난 일’의 관점에서 해방 직후의 현실을 보면 좌우합작파나 남북협상파에 희망을 거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게 된다. 그런 희망의 실현은 ‘힘의 문제’와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소련은 이미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이 이정식 교수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미국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1947년 여름부터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외세의 그러한 계획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우리에게 힘이 없었다는 것은 광복 당시 임시정부에 소속된 광복군의 숫자가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또 하나의 결함은 민중-통일사학이 한반도 분단과 통일의 ‘문명사적’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천년 동안 한반도에 출현했던 국가들은 대부분 중국의 대륙문명권으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임진왜란과 임오군란처럼 국가안보가 위태로울 때는 중국에 군사적으로 의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구도는 1945년의 광복과 함께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북한은 옛날처럼 중국 대륙문명권의 영향을 받아 집단주의적, 공동체주의적인 생활방식에 따라 살았지만, 남한은 대륙과의 관계를 끊고 낯선 미국의 해양문명권에 포함됐다. 이 같은 문명사적 전환 과정에 이승만이 결정적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방임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에 적응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지난 60년 동안 북한사회가 비교적 조용했던 것과 달리, 남한사회가 격동을 거듭했던 것은 새로운 문명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뒤따른 진통이었다. 그 진통의 대가로 대한민국은 반세기 만에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이 35달러에서 1만달러로 높아졌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올해 광복 60주년을 맞아 정부와 시민단체들은 경축사를 통해 그러한 국가적 성공을 이룩한 한민족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것이다. 그 기적을 이뤄낸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지, 한민족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민공화국 국민은 그러한 성공에 기여한 적이 전혀 없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한민국은 점차 해양문명권을 벗어나 옛날처럼 대륙문명권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한다. 그것은 중국 유학생 숫자가 미국 유학생 숫자를 능가하고, 집권당 국회의원들이 유사시의 의존 대상 강대국으로 미국보다 중국을 선호한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민은 여전히 해양문명권의 생활방식을 상당 부분 견지하고 있어 ‘문명충돌’ ‘문화전쟁’의 상태를 느끼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남북문제는 두 국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두 문명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현대사 연구는 이같은 사실을 외면한 채 이뤄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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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건국대 교수·사학 jylee@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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