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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본 세종의 통치철학

“즉흥적 발상, 경박한 발언, 무책임한 행정이 수성(守成)의 정도(正道) 가로막는다”

  •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수양대군이 본 세종의 통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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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본 세종의 통치철학

세종 13년(1431년) 강무(講武)가 벌어지던 경기도 포천 일대 지형도(대동여지도).

정치하는 방법도 바뀌어야 했다. 대사헌 신개(申쾼)가 강조한 것처럼 “창업할 때는 권도(權道)가 중요하지만, 수성의 시대에는 정도(正道)가 귀하다.” 즉 “시의(時宜)에 따라서 변경할 수 있는 손익(損益)하는 법”인 권도가 창업의 덕목인 데 비해, 수성기에는 “영세(永世)토록 전해 변경할 수 없는 경상(經常)의 법”인 정도를 앞세워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나라를 창업할 때에는 권도를 행”해서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통솔해내고” 일을 이루어내는 것이 필요하지만, “수성할 시대”에는 “정도를 지켜 국맥(國脈)을 배양”하고 “그 세대(世代)를 영구”하게 만드는 일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14/08/21). 부왕께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국가정책을 발표하기에 앞서 반드시 “숙의”하는 과정을 거치셨다. 즉흥적인 발상, 경박한 발언, 무책임한 실행을 수성의 정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보셨다.

수성의 정치를 가로막는 더 큰 장애물은 신진 유신(儒臣)들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들은 유교 이외의 모든 사상을 배척하려 했다. 물론 전조(前朝·고려)의 말과 아조(我朝·조선)의 창업과정에서 척불론(斥佛論)은 고려왕조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 이론적 무기였다. 삼봉 정도전을 비롯한 건국자들이 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그 무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삼봉의 경우 척불론의 ‘정치적 상징성’을 이용하는 데 그치고, 그 이상의 정책적 조치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의 유생들은 유교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특히 성균관의 유생과 집현전의 학사들은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태조 임금께서도 중시한 풍수지리조차 이단사상이라 해 배척했다.

풍수학에 반대한 신하들

재위 중반기의 풍수지리 논쟁이 그 한 예다. 재위 12년에 선대왕 태종의 능침(獻陵·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옆길을 풍수지리의 차원에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행(行) 사정(司正) 최양선이 “천천(穿川)의 큰길은 헌릉의 주산 내맥이니 막아야 한다”고 상언한 것이다. 이에 대해 풍수(風水) 이양달 등은 “비록 큰길이 있더라도 산맥에는 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맥(脈)에는 사람의 발자취가 있는 것이 더욱 좋으므로, 막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5/07/22; 12/08/21).

그러자 부왕께서는 “그 근원을 캐보아야겠다”면서 경연(經筵)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하셨다. 그러나 그 제의는 곧 반대에 부딪혔다. “경연은 오로지 성현의 학문을 강론하고 구명해 정치 실시의 근원을 밝히는 곳인데, 풍수학이란 것은 잡된 술수 중에서도 가장 황당하고 난잡한 것이니, 강론에 참예시킴이 옳지 못하다”며 지신사 안숭선 등이 반대하고 나셨기 때문이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역대의 거룩한 임금을 보건대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면서 “우리나라의 일로 말하더라도 도읍을 건설하고 능 자리를 정하는 데에 모두 술수 전문가의 말을 채용하지” 않았냐고 반문하셨다. 나아가 아버지께서는 “지금 헌릉 내맥(來脈)의 길 막는 일에 있어 이양달과 최양선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고집해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 자신도 그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결단하지 못하겠으니, 한번 집현전의 유신들을 데리고 이양달과 함께 그 이치를 강론”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다시 제의하셨다.

그러자 안숭선은 “전부터 경연에서는 경전의 학문만을 한결같이 해왔는데, 이제 만일 잡된 학문을 강론한다면 오랜 적공이 한번 실수로 헛되이 될까 실로 두렵긴” 하지만, “그러나 그 학문도 국가를 위해 소용되는 것이라 폐해버릴 수는 없으니, 경학에 밝은 신하를 선택해 강습하게”(15/07/07) 하는 것도 좋겠다고 동의했다. 결국 “풍수학을 강명하는 것은 결코 유자(儒者)의 분수 밖의 일이 아니라”(15/07/27)는 당신의 주장에 따라서 사상 처음으로 ‘지리전서(地理全書)’ 등의 내용이 경연석상에서 강론됐다.

이처럼 아버지께서는 유교 이외의 사상에 대해서도 “투철하게(洞)” “그 근원을 캐어본” 다음에 “나라에 이롭고”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용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상께서는 특히 “비록 주자(朱子)의 말이라도 또한 다 믿을 수는 없을 듯하다”고 해 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경연에서 당신은 주문공(주자)이 옛말의 잘못을 바로잡은 대목에 이르러서 “주문공은 진실로 후세 사람으로서는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을 바로잡은 말에는 혹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한 말 또한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19/10/23)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주자의 뛰어남을 인정하면서도 “의심”을 가지고 주자의 글을 읽으셨던 것이다.

“행한 지 오래된 걸 급하게 바꿔서야”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는 상의 면모는 불교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물론 즉위 초년에는 아버지께서도 상왕이신 태종 임금의 뜻에 따라 불교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위 중반부터 당신은 신하들의 불교개혁론에 대해서 시종 온건한 입장을 취하셨다. 승려를 뽑는 시선(試選)제도를 폐지하고 전토(田土)로 봉양하는 폐단 등을 바로잡자는 대사헌 하연(河演) 등의 상소에 대해서 당신은 “개혁을 해도 점차로 해야 한다”는 허조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 “불법(佛法)이 이단”인 것은 확실하지만, 이 법이 세상에 행해진 지가 오래돼서 “급작스럽게 개혁할 수는 없지 않느냐”(06/02/07)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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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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