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열도의 한국혼 ⑪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자, ‘정관(靜觀)’!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3/7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 망명 시절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열차에서 기다리던 일본의 극우 국수주의자 도야마(頭山滿)도 합석했다. 도야마는 중국의 쑨원(孫文), 조선의 김옥균 같은 망명객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물론 의협심이 아니라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였다.

보디가드 와다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나 떨어진 태평양상의 오가사와라(小笠原) 출신이다. 그가 김옥균을 처음 만난 것은 8년 전인 1886년. 옥균은 망명 2년차이던 그해에 일본 정부에 의해 오가사와라에 유배됐다. 요코하마를 오가는 정기 배편이 1년에 네 차례밖에 없는 낙도 중의 낙도였다. 요코하마 항구에서 슈고마루(秀鄕丸)에 강제로 실려 21일 만에 도착했다. 거기서 알게 된 소년 와다는 옥균을 한국말 그대로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 시절 이래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옥균을 좇아 아들처럼 따라다녔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해저 화산의 융기로 생긴 섬, 즉 치치시마(父島) 하하시마(母島)등 30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옥균은 아열대의 원시림이 우거진 음습한 치치시마와 하하시마에서 2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며 유배생활을 한다.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외로운 삶에 지쳐 그는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탄원서를 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관(靜觀).’

그가 오가사와라 시절에 남긴 휘호다. 견디기 힘든 몸과 마음의 병을 다스리고자 몸부림친 망명 정객의 고뇌가 잡힐 듯 와 닿는다. 딱 한 가지 위안거리라면 일본 바둑의 대가 혼인보 슈에이가 다녀간 것이다. 그 머나먼 뱃길, 스무 날을 견디며 찾아와주었다. 슈에이는 무려 석 달이나 머물며 옥균의 바둑친구가 돼줬다. 슈에이는 옥균의 유배지가 홋카이도로 바뀌자 다시 삿포로까지 찾아와 위로하고 대국(對局) 상대가 돼줬다. 도쿄 망명 직후 바둑으로 사귄 이래, 둘의 우정은 참으로 두터웠다.



김옥균과 슈에이가 남긴 기보(棋譜)가 1992년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견됐다. 1886년 2월20일의 이 대국에서 옥균은 6점을 놓고 일본 최고수 슈에이에게 230수 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오가사와라 유배는 옥균이 잘못을 저질러서 처해진 것이 아니었다. 고국에서 명성황후 일파가 옥균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 지운영(池雲英·종두법을 전파한 지석영의 형제)이 발각된 사건 때문이었다. 지운영은 무기와 독약 따위를 갖고 김옥균에 접근하다 도쿄 긴자 인근 교바시 경찰서에 체포됐다.

‘명여특차도해포적사(命汝特差渡海捕賊使).’

‘바다 건너 역적 체포의 특명을 부여하노라’는, 지운영이 지니고 있던 왕명칙서였다.

당시 옥균은 도쿄 쓰키지(현재 수산물시장과 아사히신문사 일대)의 외국인 거류지에 살고 있었다. 1991년 조선의 첫 신사유람단이 쓰키지 해변의 하마리큐(긴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해변정원)에서 영접을 받고 외국인 거류지에 묵은 이래, 조선영사관이 거기 들어서는 등 이 일대는 도쿄 진출 한인들의 교두보 구실을 했다.

일본에 있어 김옥균은 귀찮고 번거로운 존재였다. 조선 정부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반정부 망명객 옥균을 껴안는 것이 외교적으로 득(得)이 없다고 판단했다. 옥균에게는 가혹하더라도 일본의 국익을 위해 외딴 섬에 격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객 지운영을 명성황후 일파에 되돌려 보냈다.

계속된 전복 모의

자객 밀파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옥균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 성격이 급한 옥균은 일본에 와서도 명성황후 정권을 전복하려 절치부심했다. 후쿠자와의 도쿄 집에서 두어 달 머물다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 야마테초로 집을 얻어 나갔다. 이 지역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공원’으로 이름지어진 데서 알 수 있듯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곳. 개항 이래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도 외국인 묘지가 남아 있다. 현재 한국의 요코하마 총영사관이 야마테초에 멋들어진 한국식 건물로 들어서 있으니 김옥균의 선견지명이 엿보인다.

야마테초에서 옥균은 겐요샤(玄洋社)라는 우익 집단의 장사들과 접촉했다. 겐요샤는 시나가와역에서 합류해 오사카행 열차에 동승해 김옥균의 옆자리에 앉은 바로 그 인물, 도야마 미치루가 만든 조직이다.

도야마는 일본 암흑가와 정계에 전설로 남아 있다. 규슈 후쿠오카 태생인 그는 청년기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征韓論)을 지지하다 사이고가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투옥된다. 24세 때 우익단체인 고요샤(向陽社)를 조직해 국회 개설 운동을 벌이고 그 조직을 발전시켜 겐요샤로 키운다. 그의 이름과 겐요샤는 일본 국가주의 운동의 원류로, 우익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그는 테러도 서슴지 않는 괴물이었다. 정부의 외교 교섭이 비위에 맞지 않자 외무대신 오쿠마를 없애버리려 했다. 겐요샤 부하인 국수주의자 구루시마를 시켜 폭탄을 던지게 했는데, 다행히 오쿠마는 한쪽 다리만 날리고 살아남았다. 테러로 문제의 외교 교섭이 중지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3/7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목록 닫기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댓글 창 닫기

2021/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