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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⑪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자, ‘정관(靜觀)’!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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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시·서·화에 능했던 김옥균은 일본 망명 생활을 하며 글씨를 팔고, 서도 전시회를 열어 푼돈을 마련했다.

도야마는 탄광을 경영해서 얻은 돈으로 겐요샤를 움직이며 정·재계의 배후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1944년 89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관직을 맡은 적 없는 낭인(浪人)으로 일관했으나, 정부나 검경도 손을 댈 수 없는 특이한 ‘치외법권’적 존재였다.

옥균은 도야마와 겐요샤의 힘을 이용하고자 했다. 박영효는 이런 점을 못마땅해했지만 옥균은 막무가내였다. 옥균은 멀리 고베까지 가서 다루이라는 정치인을 유명한 아리마 온천(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에 불러내 조선 정부 전복을 논의했다.

옥균의 극비 모의가 고스란히 유지될 리 없었다. 다시 ‘초야신문’ 1886년 1월21일자 기사.

‘김옥균이 일본의 무뢰배 수백명을 고용해 폭약을 휴대케 하고 조선에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보도된 바 있다. 몇 달 전, 일본 배 미노마루가 인천에 도착하자 일본 경찰관이 그 배의 승객과 짐을 샅샅이 조사했다. ‘김옥균이 일본에서 무뢰한들을 조선에 보내 독을 뿌리겠다고 해서 사전 점검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것을 조선의 경찰관 김굉신이 조선 정부에 보고해 발칵 뒤집혔고, 포도청이 나서서 변란(갑신정변)의 잔당을 엄중히 수색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옥균을 처치하고자 조선 정부가 자객 지운영을 밀파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오가사와라의 통탄

그러나 옥균으로서는 망명생활도 서러운데 오가사와라로 쫓아내는 일본 정부가 더없이 야속했다. 일본의 비정함에 치를 떨었다. 그날, 정변이 실패하고 인천으로 달아나 일본 망명을 위해 치도세마루에 올라탔을 때도 그랬다.

서울에서 명성황후 정권의 수구파 대신 조병호가 묄렌도르프(독일인으로 당시 직책은 통리기무아문 협판)를 인천에 급파, 일본 공사 다케조에에게 김옥균 등의 신병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갑신정변을 함께 모의한 다케조에는 돌연 안면을 바꾸고는 김옥균 일행을 향해 배에서 내리라고 했던 것이다. 죽으라는 말이었다.

위기에 몰린 그를 구해준 것은 선장 쓰지였다. 의협심으로 배 밑창의 화물창고에 옥균 일행을 숨겨줬던 것이다. 쓰지는 옥균에게 ‘이와타 슈사큐(岩田周作)’라는 일본식 가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와타는 옥균이 일본 체류 10년 동안 즐겨 쓴 통명(通名)이다.

오가사와라 유배 조처에 옥균은 너무도 억울하다며 반발했다.

“무릇 섬으로 보낸다는 것은 유형(流刑)으로서 중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에게 보낸 유배 명령서에 죄명을 명시해야 할 일 아닌가. 나의 죄를 말해다오.”

그는 1886년 6월12일 주일러시아 공사에게 탄원서를 쓰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나를 일본에 오도록 허용했고, 그들의 보호 아래 평온하게 살게 해준 뒤, 갑자기 오가사와라에 보내 죽을 위험에 처하게 했습니다. 이는 이해가 가지 않고 국제법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암살미수범 지운영을 조선에 돌려보낸 것도 통탄스러웠다. 옥균은 영국인 변호사를 내세워 사법 당국에 고소했으나 검찰은 이유 없다며 뿌리치고 말았다. 옥균 자신은 유배당하는 신세가 됐다. 일본의 신문들이 옥균을 동정적으로 보도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고 할까.

운명의 조우

김옥균 일행이 탄 열차는 밤새 달려 다음날 오후 1시 무렵에 오사카역에 닿았다. 이일직 등이 마중 나와 반갑게 맞아줬다.

이일직. 명성황후 정권의 거물 민영소의 비밀지령을 받고 2년 전인 1892년 5월 도쿄에 온 이래,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암약해온 인물이다. 그는 쌀 무역업자로 위장해 활동하면서, 휘하에 권동수·재수 형제와 김태원, 일본인 가와쿠보를 고용해 옥균과 박영효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김옥균을 처치하려 해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데다 주변에 망명 동지인 이윤고, 유혁로, 신응희 등이 감싸고 있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박영효 또한 도쿄에 ‘친린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조선 청년 학생 30여 명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일직은 벌써부터 옥균 주변 망명 동지들의 의심을 샀으나 옥균은 그를 경계하라는 충고를 외면했다. 옥균은 “그 자를 믿지는 않지만 멀리할 필요야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자객이라도 오히려 ‘전향’해서 망명객인 자신을 도울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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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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