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열도의 한국혼 ⑪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자, ‘정관(靜觀)’!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5/7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일본 망명 당시의 김옥균(왼쪽).

이일직이 암살을 결행하지 못한 채 세월을 허송하는 동안 홍종우가 나타난다. 그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귀국하는 차에 일본에 들러, 고베와 도쿄를 여행 중이던 김옥균에게 접근했다. 그는 귀국해서 출세하고 싶었다. 일단 김옥균을 만나보고 그가 재기해 권력을 다시 장악할 것 같으면 그에게 달라붙고, 아니면 처치해서 명성황후 정권에 공을 세우면 될 게 아니냐는 계산이었다.

자객은 자객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홍종우가 이일직의 눈에 띄었다. 이일직은 홍종우를 불러내서 손을 잡자고 제의했다. 두 사람은 암살계획을 세웠다. 언젠가 김옥균은 이일직에게 말했다.

“망명생활도 벌써 10년이 되어가오. 자금이 부족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오.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말해주시오.”

그동안 글씨를 팔고 서도전시회를 열어 근근이 푼돈을 마련해왔으나 이제 그것조차 한계에 달해 있었다. 붓글씨도 팔리지 않아 곤궁은 더해갔다.

이일직과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중국에 가서 재원을 모으라고 권하고 상하이로 유인해서 처치하는 방안을 세웠다. 훗날 이일직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진술한 내용에도 그 흉계가 드러나 있다.



“김옥균은 조국혁명을 위해 무슨 방도가 있느냐고 나 이일직에게 물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프랑스에 의지하는 방법이 있고, 먼저 러시아에 가서 때를 살피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홍종우도 좋은 방도라고 맞장구를 쳤다.

김옥균의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 러시아에 가면 프랑스어가 필요할 것이고 통역으로 홍종우를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김옥균이 ‘실은 이홍장의 양자 이경방을 도쿄에서 사귀어 잘 아는 처지이니 중국에 가면 편리할 것 같다. 이홍장이 힘써준다면 대충 일이 될 것이다’고 했다. 그리하여 중국행이 정해진 것이다.”(훗날 도쿄지방재판소의 검사신문에서 이일직이 한 답변)

야마토의 여인

3월10일 오사카역에서 헤어진 도야마 미치루와는 14일과 16일 두 차례 다시 만난다. 옥균은 도야마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면서 중국행을 걱정하는 도야마에게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고 호언했다.

도야마는 만류를 단념한 듯, 옥균에게 ‘이홍장에게 선물로 갖다주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최고의 일본도로 치는 교토의 산조(三條)칼 한 자루였다. 이 일본도는 상하이에서 옥균이 살해당하자 임자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보디가드 와다가 소중하게 챙겨 도야마에게 정중히 돌려줬다.

옥균은 오사카에서 가까운 야마토에 들렀다. 거기에는 옥균의 사생아가 자라고 있었다. 옥균의 여자관계는 난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8년 전 망명 직후,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 1465번지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잠시 기식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문란한 성생활은 암흑가 보스 도야마의 권유에 자극받은 것일 수도 있다. 도야마의 얘기다.

“조선에서 김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자 그의 신변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일본 고사(古事) 중 오이시우치가 교토에서 기라의 첩자를 방심시킨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국적 행위를 버리고 주색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가 매일같이 도쿄 유라쿠초의 여관에서 시바우라의 온천장까지 들락거리며 홍등가를 방황했다.”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한 옥균. 박영효는 이런 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

혼인보와의 추억

옥균의 주색(酒色) 방종은 홋카이도 유배시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오타루에서 사귄 기생도 옥균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이는 물론 다른 여자의 소생까지 거두어 옥균의 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사실 1888년부터 2년간 계속된 홋카이도 유배는 오가사와라 유배의 연장이었다. 옥균은 오가사와라에서 위장병을 심하게 앓아 몇 차례나 일본 정부에 호소한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마침내 삿포로 체류를 허가했다. 그해 4월30일 일본의 내무대신 야마가타가 외무대신 오쿠마에게 보낸 문서에 그 경위가 나타나 있다.

5/7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목록 닫기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댓글 창 닫기

2021/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