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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나는 남한 초대 항공사령관의 아들, 장택상 전 총리의 손자사위”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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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원이던 장택상의 사위

드라마틱하기로는 이 전 대의원의 처가로 알려진 장택상 전 총리의 장녀 장성애(가명)씨의 운명도 못지않다. 1910년대 말에 태어나 경북고녀를 졸업한 재원인 장씨는, 1940년 식산은행에서 서기로 일하던 민경식(가명)과 결혼한다. 기구한 것은 남편인 민씨가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 지하당원으로 활약했다는 사실. 남로당 지하당 임시총책을 지낸 박갑동씨의 책 ‘서울 평양 북경 동경’은 민씨가 자신과 동료들에게 비밀 아지트를 제공하며 협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는 그의 장인인 장택상 전 총리가 초대 수도경찰청장으로 재직하며 ‘좌익 척결’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때다. 1960년대 씌어진 장 전 총리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곳곳에는 5남5녀인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이 등장하지만, 장녀 성애씨에 대한 언급은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다.

민씨는 일제 강점기에 관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의 제국대학에 유학해 경제학을 전공한 수재였다. 광복 후 산업은행에서 경리계장 자리까지 승진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당시 그간의 지하당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은행 총재에 임명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이후 민씨는 인민군이 퇴각할 무렵 가족을 이끌고 월북했다고 장성애씨의 형제들은 전했다. 당시 이들 부부에게는 여섯 살짜리 딸과 네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이 딸이 바로 이 전 대의원의 부인이라는 민효선씨다. 장씨의 형제들은 조카 민씨가 “유난히 총명하고 귀염성이 많은 아이였다”고 떠올렸다.

민씨 부부가 월북 이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소 엇갈린다. 서울에 있는 장씨의 형제들은 “1990년대 초반 남북간 해빙무드가 조성될 무렵 몇 가지 소식이 들려왔다”고 말한다. 부부와 일가족이 모두 1950년대 후반 대대적인 남로당 출신 숙청 시기에 처형됐다는 소식이었다.



이 무렵은 1956년 제3차 조선로동당 대회를 계기로 ‘김일성 1인체제’의 막이 오르면서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 핵심 인사들이 간첩혐의로 유배되거나 처형된 시기다. 이 때 민씨 일가도 함경도에 있는 탄광에 끌려가 고생하다가 결국 일가족이 모두 산속 오두막에 갇혀 끔찍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박갑동씨의 책에 나오는 설명은 이와는 다르다. 1950년대 후반 다른 남로당 출신은 모두 지방으로 추방당했지만, 민씨만큼은 중앙당 간부부장을 지내던 박금철의 도움으로 간신히 평양시내에 남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때까지 중앙당에서 일하던 민씨는 이후 중앙통신사 외신번역원으로 신분이 강등되긴 했지만, 강제로 유배된 다른 남로당 동료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경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씨 일가에 대한 다른 기록은 더는 발견할 수 없었다.

가족을 남겨두고

확실한 것은 이 전 대의원의 부친이라는 이영무 전 사령관이나 장모인 장성애씨, 장인인 민경식씨 모두 북한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국가정보원의 북한 주요인물 파일을 비롯해 관련기관의 인물리스트 어디에서도 이들의 이름은 확인할 수 없다. 이 전 사령관의 경우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조종사였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주요 직위에서 일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자가 접촉한 인민군 출신 인사들 중에는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다. 민씨 부부의 경우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남로당 출신이라는 한계가 두고두고 족쇄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이 전 대의원과 부인이라는 민효선씨가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전 대의원은 전쟁 후 중국 하얼빈에 유학해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전 대의원은 이후 제2경제위원회 산하 해양공업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미사일 등 군사무기의 개발 및 제조, 대외판매 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70년대에 출범한 제2경제위원회는 북한의 군수경제를 총괄하며, 내각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남측 창군멤버의 아들이자 남로당 인사의 사위라는 열악한 ‘출신성분’에도 불구하고, 이 전 대의원은 무기개발과 군수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 중국 유학 경험으로 얻은 탁월한 어학실력에 힘입어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의 군사기술 협력, 대만과의 무기거래 시도 등이 그가 담당한 분야였다고 한다. 1990년에서 98년까지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2000년대 들어 담당하던 업무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출장차 나온 중국 현지에서 귀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여러 가능성을 타진하며 해외에 머무르던 그는 2005년 5월에 이르러서야 중국에 있는 한국 관련기관에 망명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끝내 데리고 나오지 못한 혈혈단신 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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