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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선생님

정원식

고담준론에 빠져 이어진 38년 인연의 끈 이력, 화법, 제스처까지 닮아버린 師弟

  • 문용린 서울대 교수·교육학 moon@plaza.snu.ac.kr

정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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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식

정원식(왼쪽) 선생님은 제30대 문교부 장관을 거쳐 제23대 국무총리를 지내셨다. 선생님이 입각하신 지 12년 후 내(오른쪽)가 제40대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됐으니 깊은 인연이다.

그 나무 블록을 앞에 놓고 오간 선생님과 나의 대화는 무척 효율적이었다. 나도 설명하기 쉬웠고, 선생님도 이해하기 쉬워 금방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무 블록 덕분에 우리는 좋은 도서 분류 기준모형을 제시해 성공적으로 연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선생님에게서 나는 연구를 어떻게 이끌어가는지, 막강한 연구진과 어떻게 대화하는지,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실무 간사를 어떻게 다루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배우고 느꼈다.

‘절묘한 타이밍’

여러 교수가 모여 진지하게 토론하고 나면, 어느새 저녁 식사시간이 지나 있다. 서둘러 식사 자리를 마련해서 둘러앉으면 선생님의 독무대가 펼쳐진다. 선생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선뜻 음식 메뉴를 고르지 못한다. 음식 내력에 대한 정 선생님의 해박한 강의를 듣고 그 권고를 따르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란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식, 중식, 양식을 불문하고 선생님의 음식에 대한 지식은 놀랍도록 넓고 깊다. 경우에 따라서는 요리방법까지 소상하게 일러주실 정도다. 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주선(酒仙)을 넘어선다. 스카치위스키와 보드카에 대한 설명은 술 제조회사의 전문가급이고, 포도주에 대한 식견은 정말로 그 깊이가 한이 없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대식가(大食家)는 아닐뿐더러, 호주가(好酒家)는 더욱 아니다. 동반자들과 함께 음식과 술을 즐기는 것이다. 그 폭넓은 지식은 식사에 동참한 모든 이를 즐겁게 해주고, 품위를 더해준다. 교양 있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갖게 해준다.



한잔의 포도주를 마실 때도, 와인이 비싼 것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갖던 내가 선생님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와인의 향기와 맛이 어떻고, 일조량과 기후가 어떻고, 얽혀 있는 사연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음미하는 교양인으로 변모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을 닮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아직도 그 반의 반도 못 닮고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선생님께서 중요한 포도품종 몇 가지를 차근차근 불러주셨지만, 그것조차 외우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는 중 선생님께서 학교를 떠나는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988년 12월에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2개월 뒤인 1989년 2월 말, 나는 선생님이 떠나 빈 그 자리를 메울 조교수로 임명돼 서울대 교수가 됐다. 선생님이 담당하시던 교육심리학 관련 강의를 물려받은 것이다. 나의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절묘한 타이밍’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정 선생님의 문교부 장관 진출이 곧바로 나의 서울대 교수 진입과 연결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우연으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는 것이지만, 나는 선생님과 나 사이에 어떤 끈이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

이러한 끈의 느낌을 더 강화해준 ‘사건’이 이후 몇 개 더 있다. 정 선생님은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로 계시다가 제30대 문교부 장관으로 나가셨는데, 꼭 12년 후인 2000년에 나도 똑같은 위치에서 제40대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 사이엔 우리 학과에서 입각(入閣)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정 선생님으로부터 내게로 그 일이 전달돼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 선생님은 젊은 시절의 나를 가르치고 일깨워준 스승일 뿐 아니라, 환갑을 바라보는 나의 삶 전체를 이끄시는 분이란 느낌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 선생님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이끌어온 중요한 일에 선생님의 뒤를 이어 열심히 끼어들고 있다. 천원 오천석(吳天錫) 박사를 기리는 모임, 한자교육추진위원회, 그리고 금성출판사가 후원하는 독서새물결운동추진위원회가 그것이다.

2년 전 선생님은 독서새물결운동의 이사장직을 내게 물려주셨다. 독서 확산 운동을 벌이는 젊은 교사를 격려하는 정 선생님의 열정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뛰어들었는데,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해볼 생각이다.

물론 이런 끈의 느낌은 나만의 은밀한 예감이었을 뿐 누구에게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7~8년 전이었을까. 두 사람으로부터 각기 다른 자리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내가 정원식 선생님을 연상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진지한 언급을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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