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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마찰이 빚은 ‘제4차 중일전쟁’

협력의 이익보다 갈등의 이익이 더 크다?

  • 갈상돈 고려대 박사과정·정치학 galdonie@naver.com

야스쿠니 마찰이 빚은 ‘제4차 중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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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29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중일 공동성명에서 일본은 “과거 전쟁을 통해 중국 국민에 중대한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표명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이 유감 표명에 대해 중국은 전쟁배상금 요구를 철회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관계 정상화 이후 중일관계는 1982년 ‘침략’을 ‘진출’로 묘사한 제1차 교과서 왜곡 파동과 1985년 8월15일 나카소네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파동으로 한때 출렁이기도 했지만, 1995년 8월15일 무라야마 총리 담화로 과거사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당시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에서 “우리나라는 국책의 오류로 전쟁으로의 길에 들어서서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민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다시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의 뜻을 표명합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침략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을 지칭했다. 과거사에 대한 가장 진전된 반성이었다.

그런데 1998년 11월 장쩌민 주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 ‘무라야마 담화’가 문제가 됐다. 일본측은 정상회담 자리에서 ‘구두’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으나 공동선언문에 ‘사죄’를 넣자는 중국의 요구는 거부했던 것이다. 담화를 준수한다고 하면서도 거기에 표명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말을 공동선언문에 넣어야 한다는 중국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과거사 반성에 대한 일본의 진실성을 의심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쩌민은 5박6일간의 공식일정 내내 일본의 과거 잘못을 공박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공동성명서에 서명도 하지 않은 채 귀국해버렸다.

중화민족주의의 폭발

2001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새 역사교과서를 들고 나오면서 중일관계는 또 한번 요동쳤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중국 민간인 30만명이 학살됐다고 하는 난징 대학살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새역모가 편찬한 후쇼사판(版) 중학교 역사교과서(2005년판)에 난징 학살은 이렇게 묘사돼 있다.



“1937년(쇼와 12년) 7월7일 밤 베이징의 교외인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훈련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해 ‘누군가’가 총포를 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다음날에는 중국군과 전투상태가 됐다(루거우차오 사건). 그리하여 이후 8년간에 걸친 일중전쟁이 시작됐다. 같은 해 8월 외국의 권익이 집중된 상하이에서 일본인 장병 두 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이것을 계기로 일중 간의 충돌이 확대됐다.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면 장제스가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2월에 난징을 점령했다. 이때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중국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난징 사건). 또한 이 사건 희생자 수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 의문점도 제기되고 다양한 견해가 있어 오늘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중일전쟁에 대해 중국이 도발했다는 ‘혐의’를 두고 기술했으며 난징사건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정확한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축소 혹은 논란 중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린 것이다. 또한 이 교과서는 일련의 전쟁에 관한 기술에서 ‘침략’이라는 단어를 사용치 않고 ‘진출’이라고 표현했다.

이 역사교과서가 2001년에 이어 2005년 4월에도 문부성 검정을 통과하자 중국에서는 격렬한 반일시위가 발생했다. ‘중화민족주의’의 폭발이었다. 시위가 통제불능의 상태로 확산될 징후가 보이자 그제야 중국 정부는 진압에 나섰다.

제3국에서의 정상회담조차 파탄이 날 조짐은 2004년 11월에 열린 두 차례의 중일 정상회담에서 드러났다. 그해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APEC 회의와 라오스에서 개최된 ASEAN+3 정상회담이 무대였다. 칠레 회담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중일 간 우호를 위해 야스쿠니 참배를 그만둘 것을 대놓고 요구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그 답변을 라오스에서 회담 상대자로 나선 원자바오 중국 총리에게 들려줬다.

그는 “중국이 일본의 대외원조자금 수혜자 자리를 졸업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 1979년부터 25년간 계속된 대외원조계획(ODA·정부개발원조)을 끝내겠다고 ‘통보’했다. 의도적인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2000년부터 대폭 삭감된 일본의 대(對)중국 ODA 자금 지원규모는 점차 줄어들다가 2008년말에는 완전히 끊길 전망이다. 일본은 이 자금을 동남아와 중남미, 아프리카로 돌릴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관계악화의 가속페달을 해를 넘겨서도 계속 밟고 나아갔다. 2005년 2월19일 워싱턴에서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군사협정에 서명했다. 대만해협의 안보가 미국 부시 행정부와 일본의 ‘공동의 전략적 목표’임을 처음으로 명시하는 내용이었다. 대만이 독립선언을 해 본토와 대만 간에 긴장이 고조되면 일본이 미국과 함께 ‘출병한다’는 것을 공개 선언한, 말하자면 대중(對中) 선전포고였다. 두 달 뒤 마치무라 외상은 공식적으로 대만을 “미일 안보조약 대상”이라며 중국의 뺨을 때렸다. 그렇지만 대만 문제는 30년 넘게 지속된 터라 정상회담 거부의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다.

전몰자 대부분은 중일전쟁 사망자

2005년 5월 고이즈미는 중의원에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계속할 것”이라며 결정타를 날렸다. 고이즈미 발언 직후 일본을 방문한 우이 부총리가 예정돼 있던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을 전격 취소하고 귀국해버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정상회담 중단은 고이즈미가 야스쿠니 참배를 기정사실화한 5월에 이미 결정됐고, 10월17일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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