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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거물 화상(畵商) 되어 돌아온 청년 광부, 김희일 갤러리 아트뱅크 관장

“미술에 투자하세요, 루벤스와 벨라스케스가 곳곳에 묻혀 있어요”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거물 화상(畵商) 되어 돌아온 청년 광부, 김희일 갤러리 아트뱅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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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가 어찌나 정중하고 예의바른지 몰라요. 그림 수집하는 사람들은 대개 독일 사회에서도 최상층이죠. 대개 ‘캐슬’이라기보다 팰리스(palace)라고 할 만한 집에서 살지요. 나도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서 집사람을 밍크코트 입혀서 데리고 나갔던 게 기억나요. 그 사람이 ‘돈을 준비해오긴 했는데 3만달러 정도가 모자라니 대신 이 그림을 받아줄 수 있겠냐’면서 19세기 프랑스 화가 코로의 그림을 한 점 내놓더군요. 그 그림도 굉장히 값나가는 명화였거든요.”

돈이 가득 담긴 바퀴 달린 여행가방을 받고 소년의 초상화를 건네고 나니 꿈인지 현실인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림 한 점으로 평생을 벌어도 손에 넣지 못할 거금을 거머쥔 벼락부자가 된 것이다. 그 신사가 그림을 물러달라고 오면 어쩌나 겁도 났다. 아내와 둘이 우리 이 돈 들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버릴까, 궁리했다. 침대 밑에 돈뭉치를 밀어넣으며 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벨라스케스…

김씨의 아내는 1973년 간호사로 독일에 간 채금자씨. 1975년 휴가 때 그의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해 함께 유럽을 일주한 인연이 이어져 결혼에 이르게 됐다. 채씨가 들려주는 에피소드 하나.

“이 사람은 맘에 드는 그림을 하나 사들면 현실을 잊어버려요. 밥 먹는 것조차 까맣게 잊는다니깐요. 제가 첫아이를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 할 때였는데, 독일 남부에서 그림을 하나 샀어요. 조수석에 앉은 절더러 운전석에서 그 그림이 잘 보이게 들고 있으래요. 남편 말이 하늘인 줄 알 때였으니 시키는 대로 들고 있었지요. 팔도 아프고 배도 고픈데 그림만 보면서 저이는 연신 싱글벙글이에요. 그러면서 휴게소를 암만 지나쳐도 밥 먹을 생각을 않는 거예요. 다음 휴게소에서 밥 먹고 갈까, 하더니 웬걸 한번도 멈추지 않고 집까지 예닐곱 시간을 그냥 달려가는 겁니다. 나는 언제나 밥을 먹나 싶어 말도 못하고 계속 그림만 들고 있었죠.



그러다 나중에는 서러워서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한국에 있으면 임신했다고 엄마가 얼마나 잘 거둬 먹일 텐데 낯선 나라에서 배 곯아가면서 팔 아프게 그림이나 들고 벌을 서다니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 사람 머릿속엔 1초라도 빨리 집에 가서 그 그림이 어느 시대 누구 작품인지 자료를 찾아볼 생각밖에 없었던 거더라고요. 밥 생각이 날 리가 없지요.”

목돈이 손에 들어오자 그에게는 날개가 달렸다. 유럽 전역이 그의 무대가 됐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본격적인 미술품 경매장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굵직한 명사가 됐다.

“그 소년의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어놓은 게 있었어요. 그걸 영국 경매장에 갖다 보여줬죠. ‘내가 아는 사람이 이 그림을 가지고 있는데 살 의향이 있냐’고 넌지시 물어봤죠. 그랬더니 바짝 매달려요. 가져오기만 하면 당장 100만파운드를 주겠다는 거예요. 100만파운드면 200만달러고 독일돈으로는 600만마르크거든요. 내가 판 값의 다섯 배가 되는 거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년의 초상화는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희귀한 작품이었다. 크리스티에서 그 말을 듣고 그림을 사간 사람 집을 찾아갔다. 잘 보이는 곳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혹 자신에게 되팔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그는 서랍을 열더니 다섯 장의 감정서를 내보였다. 그중엔 맨 처음 그에게 감정료를 3000달러나 요구해서 포기했던 17세기 회화 전문가의 감정서도 들어 있었다. 되팔 리가 없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게 있어요. 미술시장의 규모는 끝이 없구나. 몇백달러짜리가 있는가 하면 수천만달러짜리 그림도 있구나. 그림시장에 뛰어들면 가능성이 무한하겠구나….”

미술 경매장 큰손 ‘갤러리 킴’

여행업과 그림 수집을 겸하며 살았지만 그의 공식 직업은 학생이었다. 독일에서는 학생비자로는 공부말고 다른 일은 못하는 게 원칙이었다. 포드 무스탕을 타는 잘나가는 학생인 그에게 어느 날 외국인 담당관으로부터 출두 명령이 떨어졌다. 갔더니 그가 만든 한글판 유럽여행 안내도가 책상 위에 딱 놓여 있었다. 학생이면서 이런 영업을 했으니 15일 내로 독일을 떠나라고 했다. 그러고는 여권에 ‘추방’이라는 도장을 꽉 찍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이골이 난 대한의 저력 있는 사나이! 이 난국을 타개할 길을 맹렬히 찾다가 한독친선협회 회장으로 있던 슈바르츠씨를 알게 됐다. 독일 중부지역인 라인란트팔츠 주의 내무장관이자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던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원하는 게 공부냐, 사업이냐” 하고 물었다. 사업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전 깨달은 대로, 미술품을 처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원래 유학생이 아니라 광부로 독일에 온 것과 유난히 순박하고 부지런하며 주변에 평판이 좋은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자기 관할 지역으로 이사를 오면 새로 여권을 만들어주겠노라고 했다. 아내가 간호사로 일하던 곳이 하이델베르크였다. 거기가 바로 라인란트팔츠 주였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리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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