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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떠나는 중국여행 ⑥

‘붉은 수수밭(紅高粱)’

원시 열정의 영웅들, 오만한 현대문명에 짓밟히다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붉은 수수밭(紅高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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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산둥에서는 독일이 철도 놓는 것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격렬했다. 의화단운동(1900)이 대표적이다. 민간신앙과 의화권이라는 민간무술이 결합되어 조직된 의화단의 근거지가 바로 산둥이었고, 이들은 산둥을 넘어 베이징까지 진격해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8국 연합군과 일전을 벌인다. 추억의 영화 ‘북경 55일’이 바로 그 이야기다. 소설 ‘탄샹싱’에서 그렇게 철도 부설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우두머리는 독일군과 청나라 관군에 잡혀 끔찍한 탄샹싱 형벌을 당한다. 탄샹싱 형벌은 항문에서부터 박달나무 쐐기를 박아 넣어 입으로 나오게 하되,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죄인이 극심한 고통을 맛보게 하는 형벌이다.

그런 고난이 서려 있는 철길을 따라 1시간30분 만에 가오미에 도착했다. 가오미는 시이지만 우리 읍내만하다. 시내에서 약 20㎞ 떨어져 있는 촬영지까지 왕복 100위안(약 1만3000원)을 내기로 하고 택시를 잡았다. 이 운전기사는 오늘 운수대박이다. 기본요금이 6위안(약 800원)인 이곳은 어지간하면 기본요금으로 해결될 만큼 작은 도시인데, 3∼4시간 만에 100위안을 벌게 됐으니 말이다.

원작자인 머옌에게 사전에 이메일로 도움을 받은 대로 먼저 머옌의 고향 마을로 간다. 30분 정도 걸려서 머옌의 생가에 도착했다.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2002년 설날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다녀가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생가를 한바퀴 둘러본다. 평범하다못해, 초라해 보인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나이 든 어르신이 다가온다.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머옌을 아시냐”고 묻고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악수를 청한다. 그 어르신은 내 말을 알아듣지만 나는 어르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중국어를 배워도 소용이 닿지 않는 이럴 때가 가장 난감하다. 운전수가 나서서 어르신 말을 보통화로 통역해준다.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담배연기를 뿜어대면서 쉴새없이 떠드는 운전사의 말도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보다는 알아듣기가 훨씬 수월하다.

“영화 ‘붉은 수수밭’을 촬영한 곳이 이 마을이냐”고 물었더니, 아뿔싸! 여기가 아니란다. 머옌에게서 그의 고향만 확인한 것이 탈이었다. 여기서 10분쯤 더 가야 한단다. 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어디라고 설명하는데 택시 기사도 통 못 알아듣는 눈치다. 답답했던지, 할아버지가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선다. 할아버지가 택시 앞자리에 타고 비포장 길을 달려 도착한 곳이 쑨자커우(孫家口). 한겨울이라 주위에는 마른 수수더미만 널려 있을 뿐 ‘붉은 수수밭’을 찍었음직한 곳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칭사교와 붉은 수수밭



막막한 표정을 짓고 있자 영감님이 손으로 다리 하나를 가리킨다. 순간, 눈이 번쩍한다. 바로 그 다리다. 칭사교(靑紗橋). 돌로 된 짧은 칭사교는 영화에서 스바리(十八里) 마을과 붉은 수수밭을 잇는 다리다. 여주인공 주얼(궁리 분)이 돈에 팔려 나병환자에게 시집갈 때 이 다리를 건너고, 혼례 후 사흘째 되는 날, 친정으로 신행을 떠날 때도 이 다리를 건넌다.

겨울에 찾아온 것이 잘못이었다. 텅빈 평원에 차가운 바람뿐이다. 작열하는 붉은 태양이 수수잎 사이사이로 섬광처럼 빛나면서 붉은 수수가 파도를 이루어 일렁이던 그 장관의 붉은 수수밭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 원래 이곳 수수밭이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넓지는 아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수수는 촬영을 위해 일부러 심은 것이었다.

애초에 장이머우가 가오미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원작자인 머옌은 반대했다. 소설 속의 붉은 수수밭은 할아버지 시대의 이야기이며,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신화이고, 꿈의 경계일 뿐이어서 가오미에 그런 수수밭이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장이머우 감독은 막무가내였다. 1987년 봄, 땅을 빌려 수수를 심었다. 그렇게 수수를 심은 곳이 바로 칭사교 다리 건너편이다. 그런데 수수를 심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수 절반이 죽어버렸고, 남은 것마저 키가 고작 1m밖에 되지 않는데다 잎도 다 말라 타들어갔다. 장이머우는 현(縣) 사무실로 달려갔고, 현 서기를 졸라서 화학비료 5t을 얻어냈다. 수수를 살려내는 것이 한가한 시골 현의 중요한 업무가 됐고, 현 서기를 비롯한 전 주민이 동원되어 마침내 수수를 살려냈다. 영화에서 사랑, 원시적인 힘, 열정, 야성, 순수를 상징하는 그 붉은 수수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붉은 수수밭’은 내레이터인 손자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 시대를 사는 손자가 붉은 수수밭에 살던 영웅들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머옌의 소설은 과거 그 붉은 수수밭 세계에 살던 순종 인간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상징되는 붉은 수수밭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지금 잡종의 시대를 살고 있는 불초(不肖)한 손자가 마련한 기억의 제단이다.

장이머우는 그런 소설의 핵심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빼어난 영상 미학으로 빚어낸다. 장이머우의 초기 대표작들은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대개는 소설보다 못한 태작이 되고 마는데, 장이머우는 영화감독 가운데 원작 소설의 핵심을 제대로 포착해 원작보다 나은 영화를 만드는 빼어난 능력을 지녔다. 영화 ‘붉은 수수밭’이 성공하면서 원작자 머옌도 유명해졌다. 머옌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한다.

“처음에는 장이머우가 내게 빚을 졌고, 나중에는 내가 장이머우에게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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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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