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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선생님

문학의 숲으로 이끌어준 벽안의 여교수 메리 K. 패터슨

“이봐, 좋아하는 일은 어렵다고 포기하는 게 아냐”

  •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문학평론가 tdlee@sogang.ac.kr

문학의 숲으로 이끌어준 벽안의 여교수 메리 K.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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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내 주변은 어두웠지만 그 촛불을 따라 앞만 보고 걸어가기로 하고, 전후방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유학시험을 준비했다. 그 결과 미국의 주립대학으로는 가장 역사가 깊은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대학원 입학허가 통지서를 받았다. 등록금 면제 장학금도 함께 받아 기쁨은 더했다.

당시 나는 미국 대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지만, 그 대학이 캘리포니아대(버클리)보다 먼저 설립됐고, 미국 전역 대학의 영문학 분야에서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명문임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선생님은 첫 편지에서 “노스캐롤라이나대 문과대학 영문과에서 입학허가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시며 사범대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하는 방안도 고려해보자고 하셨다. 그러나 어렵사리 대학원으로부터 나의 입학결정 소식을 들으시곤 “끝내 소원 성취를 했다”는 반가운 연락을 보내오셨다.

1966년 11월 제대한 후 일주일의 여유도 갖지 못한 채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해 겨울 미국 중부에는 몇십년 만에 처음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눈길에 막혀 며칠 밤을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자야 했기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그러나 유서 깊은 남부의 대학 건물들과 우람한 고목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정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은 벅찬 희망으로 설다. 공항에 마중 나온 선생님 내외분은 나를 기숙사가 아니라 당신들의 집으로 데려가셨다. 그 덕분에 나는 개학할 때까지 2주일가량 선생님댁에서 머물 수 있었다.

대물림되는 사제의 정



선생님 내외분은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 속 작은 집에 살고 계셨다. 선생님댁엔 곱게 연세 드신 노인 한 분이 계셨다. 처음에는 그분이 패터슨 교수의 어머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 그분이 패터슨 교수의 어머님이 아니라 은사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원래 예일대가 있는 북부, 뉴헤이번에 사는 부인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도그우드꽃이 하얗게 피는 4월이면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패터슨 교수님의 은사는 생전에 부인과 함께 해마다 겨울이면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제자의 집을 찾았던 것. 그분은 남쪽에 내려왔다가 제자인 패터슨 교수님 곁에서 임종을 맞으셨다고 한다.

예일대 교수였던 패터슨 교수님의 은사는 세상을 떠나기 전, 남부에 있는 제자에게 와서 “내 스승인 세계적인 극작가 손턴 와일더(Thornton Wilder)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패터슨 교수님도 ‘우리 읍내’의 작가로 유명한 손턴 와일더, 즉 은사의 은사를 꼭 한번 뵙고 싶었다고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패터슨 교수님은 돌아가신 은사의 시신을 입관해 북부 뉴헤이번으로 옮기던 중 어느 휴게소에서 손턴 와일더의 시신을 싣고 가는 운구차와 유가족을 만났다고 한다. 비록 두 주인공은 관 속에 있었지만, 삼대(三代)의 스승과 제자가 마지막 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그후 나는 기숙사에 들어와 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 무렵 나는 한국에서 사전을 찾아야 단편소설 몇 편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영문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학원의 강의 수준은 달랐다. 하루에도 소설 100여 쪽 이상을 읽어야 하는 영문학의 바다에 던져져 마치 익사할 것만 같았다. 이때 패터슨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학기말 시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기숙사 문을 열고 나오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선생님께서 “걱정하지 마라. 시험 잘 볼 수 있을 테니”라고 쓴 종이를 기숙사 문 위에 머리핀으로 고정해놓고 가신 것이다.

또 내가 영문학 공부의 어려움과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전과(轉科)를 생각할 때도 선생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열중하다 보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그렇게 학문하는 데 있어 지구력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셨다.

그뿐 아니다. 마지막 학위논문은 물론 학기말 논문 숙제까지 제출 전 점검해주시고 크리스마스 때는 책과 책가방을 선물로 주실 정도로 내게 온갖 정성을 기울이셨다. 그러다 보니 내 영문 필치까지 선생님의 필치를 닮아갔다. 1969년 겨울, 내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선생님 내외분이 나보다 더 기뻐하신 건 당연하다.

선생님은 그곳에서 힘겨운 대학원 공부를 할 때만 내게 도움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대학에 자리를 얻는 일에도 크게 도움을 주셨다. 1969년 봄 논문을 쓰기 위해 채플힐을 떠나 캔자스에 머물고 있을 때, 노스캐롤라이나대 영문과 출신으로 오늘날 서강대를 명문으로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전 서강대 총장 존 P. 데일리 신부님이 대학 도서관 건립을 위한 모금차 채플힐을 방문하셨다. 그때 선생님의 부군인 패터슨 교수님께서 데일리 신부님께 나에 대한 말씀을 간곡히 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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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영문학, 문학평론가 tdlee@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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