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⑧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확인된 살인만 314건, 조선반도 경악케 한 사교집단의 최후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3/8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백백교의 대표적인 비밀아지트였던 양주 천원금광사무소.

동대문서 고등계는 지난 2월16일 밤 10시를 기해 필사적으로 백백교 검거에 나섰다. 두 달여의 활동에 의해 백백교의 죄상이 청천백일하에 폭로되었다. 백백교는 이름만은 종교단체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순전한 사기, 부녀자 능욕, 강도, 살인 등을 거침없이 한 흉악무도한 결사다. 소위 교주된 자와 그 간부가 되는 자들은 우매한 지방 농민들을 허무맹랑한 조건으로 낚아 재산을 몰수하고, 부녀자의 정조를 함부로 유린한 후, 그 비밀을 막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육을 감행했다. 교도 중에서 피살된 자가 사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현재 판명된 자만도 158명에 달한다. 전율할 숫자는 세계범죄사상 전무후무한 범죄기록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 1937년 4월13일자 호외)

교도의 사체를 파묻은 백백교의 비밀 아지트는 한두 곳이 아니었다. 수사 결과 양평, 연천, 붕산, 사리원, 세포, 유곡, 평강 등 전국에 산재한 20여 곳의 비밀 아지트에서 모두 314구의 사체가 발견됐다. 살인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버젓이 자행됐다. ‘벽력사’ 문봉조는 신당리 자택에서 교도를 살해한 후 대담하게도 사체를 자전거에 싣고 백주에 종로와 남대문을 가로질러 한강까지 내달렸다. 서울에서 살해당한 교도 수십명이 한강물에 던져지거나 마포, 청량리 일대에 암매장됐다.

양주군의 ‘천원금광사무소’는 교도 살해에 이용된 비밀 아지트 중 대표적인 곳이다. 당시 전 조선은 황금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금광이 들어섰다. 그러한 시기, 깊은 산골에 세운 비밀 아지트는 금광으로 위장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전용해는 1935년 양주 봉암산 기슭에서 비밀 아지트를 세우기에 적당한 장소를 발견했다. 으슥한 골짜기에 간이건물을 짓고 ‘천원금광사무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부근을 금은광구로 출원하고 인근 유지와 관리들을 초청해 성대한 개소식까지 거행했다. 수시로 빈 화약을 터뜨렸기에 바로 인근 주민들조차 그곳이 금광을 가장한 ‘도인장(屠人場)’임을 까맣게 몰랐다. 천포금광 일대에서만 40여 구의 사체가 발굴되었다.

경찰은 전용해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용해는 만일을 대비해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김두선’을 비롯한 16가지 가명을 쓰는 치밀함을 보였다. 전용해의 인상착의는 전적으로 체포된 백백교 핵심 간부들의 진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동거하던 애첩들조차 그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본 적이 없어 생김새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2인자 이경득과 교주의 아들 전종기 정도였다.

경찰은 검거에 나선 지 50여 일 만에 양평군 용문산에서 전용해로 추정되는 사체 한 구를 발견했다. 전종기는 코 아랫부분이 산짐승에게 먹혀 없어진 시체를 보자마자 “아이고 아버지!” 하고 대성통곡했다. 양복 주머니에선 전용해가 차고 다니던 시계와 80여 원이 들어 있는 지갑이 나왔다. 부검 결과 전용해의 사망 시각은 2월21일 정오경으로 밝혀졌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자신을 믿는 교도들에게 장생불사를 약속했던 전용해는, 유곤용과 다툰 지 닷새 만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신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일 뿐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백백교의 기원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북 영변 태생의 동학도 전정운은 금강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1900년 천지신령의 도를 체득한 후 세상에 나왔다. 전정운은 전용해의 부친으로 당시 나이 30세였다. 그는 함남 문천군 운림면을 중심으로 인근 사람들에게 도를 전했다. 그를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1912년 강원도 금화군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정식으로 백도교(白道敎)를 개창했다. 강원도를 중심으로 부근 각처에 지부를 두고 포교에 힘써 1915~16년에는 교도가 1만명을 헤아렸다.

1919년, 교주 전정운이 죽자 교세 확장 방법을 둘러싼 간부들의 대립과 부친 유산 분배를 둘러싼 골육간의 싸움으로 교단이 분열된다. 결국 세 아들이 모두 독립해 각자 교단을 하나씩 차렸다. 1923년 5월 전정운의 맏아들 전용수는 간부 이희용을 표면상의 교주로 하여 경성부 도화정에 본부를 둔 인천교(人天敎)를 창립했다. 같은 해 7월 둘째아들 용해는 차병간을 표면상의 교주로 내세워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서 백백교를 창립했다. 셋째아들 용석도 형들에 지지 않고 경성부 도화정에 도화교(桃花敎)를 세웠다.

인천교는 “하늘 밖에 사람이 없고 사람 밖에 하늘이 없다. 사람은 곧 조그만 하늘이다”라는 천인일체설(天人一體說)을 표방했다. 이에 대해 백백교는 유불선(儒佛仙) 삼도를 합한 것을 교리로 하고 교주는 ‘결백한 심령’을 가지고 퇴폐한 세도인심(世道人心)을 교화하여 추악한 현세를 아름답게 한다는 설교로 신도를 모았다. 백백교는 백도교의 성지 함남을 비롯하여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까지 교세를 확장했다.

파죽지세로 뻗어가던 백백교의 교세는 1930년 7월, 10여 년 전 백도교 교주 전정운이 금화군 오성산에 그의 애첩 4명을 산 채로 파묻은 구악이 폭로돼 한풀 꺾인다.

미신의 복마전 백백교를 중심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던 강명성, 최윤성 등 10인에 대한 예심이 종결되었다.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백교의 전신 백도교 교주 전정운은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선인(仙人)이 된다는 터무니없는 선전으로 우민을 우롱하며 5~6명의 부인교도를 유혹하여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 그중 남달리 미색이 뛰어나 첩으로 삼았던 박씨(25세), 이씨(18세), 최씨(20세) 등을 교주 전정운의 명령으로 피고들이 일부는 산 채로 생매장하고 일부는 사설 교수대에 교살한 것이 사건의 개요이다. 전정운은 이미 죽은 관계로 살해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1931년 9월3일자)

3/8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목록 닫기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댓글 창 닫기

2020/0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