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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 원류 탐험기 ②

미국의 기원, 제임스타운·윌리엄스버그

초기 이주자의 땀과 눈물 그대로 복원한 ‘실용적 현실주의’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미국의 기원, 제임스타운·윌리엄스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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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단은 영국을 떠난 지 6개월 만인 1607년 5월14일 제임스 섬에 당도했다. 통상의 여정대로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에 들러 대륙의 동안을 타고 북상했으나, 역풍을 만나 지체됐다. 항해 도중 39명이 사망해 일행은 모두 105명으로 줄어 있었다. 뉴포트의 지휘하에 이주자들은 체서피크 만으로 흘러드는 강줄기들을 답사한 뒤 회사의 지침에 가장 적합한 제임스 섬에 정주하기로 작정했다. 바다와 적당히 떨어져 있고, 섬이면서도 육지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늪과 연결돼 있어 육지로 진출하고 방어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후와 환경이 좋고 먹을 것 또한 풍부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결정이 현명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섬 전체가 모래땅이라 식수부터 문제가 되었다. 우물을 파도 소금기 밴 물이 나와 강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날씨가 더워지자 이는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 인근 늪의 극성스러운 모기떼 또한 문제였다. 여름이 오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자 이주자들은 이질과 말라리아에 걸려 무수히 죽어갔다. 식량마저 떨어져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희생자는 더 늘어갔다. 영국으로 돌아갔던 뉴포트가 이듬해 1월 보급품을 싣고 돌아왔을 때 제임스타운에는 첫 정착자의 60% 이상이 사망하고 고작 38명이 살아남아 있었다.

식민지 주역 존 스미스

식민지의 이런 가혹한 환경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내홍의 분란에 휘말린 지휘체제 또한 희생을 가중시킨 요인이었다. 버지니아 식민회사는 중지를 모아 낯선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7인 평위원회가 식민지 운영을 책임지는 집단지도체제를 택했다. 그러나 평위원회 제도는 의견의 불일치로 인한 의사 결정 지연과 위원들간의 파당 형성으로 식민 사업을 파행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조짐은 이미 항해 중에 나타났다. 가령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주역인 존 스미스는 선단이 영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란선동죄로 체포·구금됐다. 항해책임자 뉴포트와 불화가 생긴 때문이었다. 스미스는 제임스 섬에 정착한 지 한 달이 다 돼서야 연금에서 풀려나 평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스미스는 평의원으로 일하면서도 첫 위원장으로 선출된 에드워드 윙필드, 그리고 윙필드를 밀어내고 2대 위원장이 된 존 래드클리프와 잦은 의견 충돌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처럼 식민지 지도층과의 갈등으로 그들로부터 소외됐던 존 스미스가 어떻게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주역으로 역사에 기록됐을까. 제임스타운 정착을 위한 스미스의 노력과 업적은 단연 돋보였다. 그는 정착지 주변 지형을 답사하고 인디언과 협상하고 교역해 식량을 구해오는 임무를 맡았다. 일찍이 네덜란드를 거쳐 헝가리, 터키, 러시아를 편력하면서 기른 담대한 용기와 능란한 임기응변 덕분에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유명한 포카혼타스 일화도 이 책무를 수행하는 중 일어난 일이다. 1607년 12월, 스미스는 식량을 구하러 일행 9명과 함께 치카호미니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인디언의 포로가 됐다. 그는 일행과 더불어 인디언 추장 포우하턴 앞으로 끌려갔다. 포우하턴은 체서피크만 인근 125개 마을에 흩어져 사는 32개 부족으로 구성된 포우하턴 연맹체의 수장인 강력한 군주였다. 그는 스미스를 심문한 뒤 죽이라고 명령했다. 인디언 전사가 돌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순간 포우하턴의 딸 포카혼타스가 달려나와 스미스의 목을 껴안고 그를 살려주기를 간청했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포우하턴은 이를 신의 계시로 여겨 스미스를 그냥 돌려보냈다.

이주자들이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스미스가 이처럼 목숨을 걸고 발로 뛰어 구해온 식량 덕분이었다. 이런 공으로 스미스는 1608년 9월, 임기 1년의 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곧바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조치를 취해 식민지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방책을 더욱 공고히 쌓고, 우물을 깊이 파 안전한 식수를 확보하고, 옥수수 재배 면적을 대폭 늘려 식량의 자립도를 높였다.

그는 식민지의 가장 큰 문제점이 일해본 경험이 적은 젠트리 계층 이주자들의 무력함과 나태에 있다고 봤다. 정착지 건설에는 여러 분야의 기술자와 농부가 필요했는데, 첫 이주자의 50% 이상이 젠트리 계층 출신이었다. 이들은 생존에 필요한 실무적인 일은 기피하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 찾는 일에 매달리기 일쑤였다. 스미스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모토로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밭을 갈고 사냥에 나서도록 했다.

스미스의 귀환, 제임스타운의 자립

이런 공로에도 불구하고 존 스미스가 버지니아 식민지의 공식 지도자로 일한 것은 1년도 채 안 된다. 이듬해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는 새로운 특허장에 입각해 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전권을 갖고 식민지를 다스리는 지사제를 도입, 첫 지사로 토머스 웨스트를 임명했다. 이전과 달라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본의 출자뿐 아니라 노동력의 출자도 허용한 점이었다. 이는 담배 재배가 본격화하면서 긴급했던 노동력 공급수단인 연한계약 노동자(indentured servant)를 고용하는 길을 열었다. 이로 인해 남녀노소 합해 600명 이상이 신대륙 이주를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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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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