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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여행가

중동 오지 서양에 알린 여성 탐험가 프레야 스타크

사막과 산악 헤매며 세계 지도 빈 공간을 채우다

  •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중동 오지 서양에 알린 여성 탐험가 프레야 스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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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야는 베두인족을 좋아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베두인은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까지 낯선 방문자에게 나누어준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베두인어는 시적 언어다. 시적 표현이 매우 풍부하다. 아랍인들은 서구인들처럼 텍스트를 통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으로 역사를 이해한다. 종교는 여전히 큰 힘이다”라고도 했다.

그는 고고학자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울리가 고고학적 대발견을 하던 시절에 이라크에 있었던 것을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가 보여준 우르의 지구라트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함께 걷던 거리의 집 하나하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엔 상점이 있었고, 저곳엔 학교가 있었다고 설명해줬다”고 자랑하곤 했다. 당시 이라크는 영국식 입헌군주국으로 첫발을 내딛던 시기로, 그때의 바그다드에 대해 프레야는 1929년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오늘 아침 바그다드는 그 옛날의 아라비안나이트를 재현했다. 공중에 매달린 채색 발코니, 넓은 가로와 연결되는 좁은 골목, 흰색 갈라비아(아래위가 통하는 헐렁한 남성 복장) 차림에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

유럽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가 집을 구한 것은 그때쯤이고 또 집이 자기 맘에 쏙 든다고 했다. 전통적인 아랍인 지구에서 한 달에 1실링짜리 방을 빌렸는데, 방 한쪽이 커다란 창이라 그 앞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티그리스 강이 내려다보였다.

이 시기 그는 쿠웨이트와 이라크 남부 습지를 여행했으며 거기서 고기잡이배도 보았다. 석유 붐이 일기 전 진기한 풍경의 쿠웨이트 시장을 사진으로 찍어 서구인들에게 전했다. 당시 바그다드와 쿠웨이트의 풍경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바그다드 타임스에 기고한 에세이를 묶어 발간한 ‘바그다드 스케치’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왕립지리학회 ‘백 기념상’ 수상

프레야는 1930년 4월, 달랑 지도 한 장을 들고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사신파’라는 비밀 조직이 있는 페르시아의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아사신파 이야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엘부르즈 산맥의 알라무트 산에 ‘산상의 노인’이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상의 노인 무하마드는 시아파의 하나인 이스마일파의 지도자였다. 그곳에는 1090년 하산이 조직한 ‘아사신’이라는 암살단이 살고 있었다. 자객을 뜻하는 ‘어새신(assassin)’의 어원인 아사신은 아랍어 ‘하시시(대마)’에서 유래된 말이다. 비밀조직인 암살단을 훈련할 때 대마 같은 약물을 이용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하마드는 열두 살에서 스무 살까지의 청소년들을 눈을 가린 채 각지에서 데려왔다. 요새는 무릉도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절세미인과 맛있는 포도주와 산해진미가 소년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언제나 마약과 함께 주어졌다. 암살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했다. 그것은 낙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프레야는 이 이야기를 토대로 알라무트 산 일대를 탐험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서양 여성이 홀로 험준한 산속으로 찾아들어온 것을 본 토착민들은 기특하다고 여겨 식사와 잠자리 등을 제공했다.

그는 마침내 안내인 없이는 찾기 힘든 높다란 바위산 골짜기 뒤편의 알라무트 요새에 닿았고 위치와 특징을 세세히 관찰했다. 그리하여 영국 지도에 빈 공간으로 남아 있던 곳을 채우게 됐는데, 프레야는 그 일을 자신이 해냈다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지 4년 만에 그 내용을 ‘아사신의 계곡’이란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고, 이 일로 필명을 날렸다.

알라무트 산을 다녀온 지 꼭 1년 뒤인 1931년 6월, 프레야는 다시 바그다드로 향했다. 이제 바그다드는 낯선 땅이 아니었다. 환영해주는 사람도, 부탁만 하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할 친구도 많았다.

그가 찾고자 한 곳은 아사신파 성채가 함락된 뒤로 오랫동안 몽골군에 항거했던 라미아세르 성과 샤루드 계곡이었다. 쿠르드족 거주지역으로 잠입해 절벽 위로 솟은 라미아세르를 발견하고는 꼭대기에 올랐다. 왕립지리학회에 보낼 성채의 급수관과 저수시설을 촬영한 다음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테헤란에선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캐나다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바그다드로 발길을 돌렸다.

예멘 고대 항구 카나 찾아내

1933년 6월, 런던으로 돌아온 프레야는 왕립지리학회로부터 지도상에 잘못 된 점을 바로잡아준 공로로 지리학 발전에 기여한 지리학자와 탐험가에게 주는 ‘백 기념상’을 수상했다. 방송사에선 강연을 해달라고 했고 출판사는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파티에도 초대되어 유명 인사들과 사귀게 됐는데,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을 접수한 앨런비 장군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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