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폭동을 시발로 남한 각지에서는 수백수천의 노동자, 농민, 시민이 경찰서, 군청, 지서, 읍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군정경찰과 군정 관리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지방행정을 사실상 마비시키면서 일대 항쟁을 전개했다. 실로 전투를 방불케 하는 격렬한 양상이었다. 항쟁은 12월 초까지 73개 시·군을 휩쓸고 지나갔으며, 연인원 230만명을 동원해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군중투쟁 기록을 남겼다.
친일경찰의 득세
9월 총파업은 대구폭동을 계기로 경북도로 확대되고 다시 경남을 비롯한 남한 각지로 파급됐다. 대구·경북 지역이 항쟁의 발원지가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미군정이 친일경찰을 군정의 요직에 기용하고, 경제정책 실패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며, 미소공위 휴회로 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1946년 여름 하곡 수집을 계기로 최고조에 달했다. 대구경북 지역은 미군정 정책파탄의 총체적 모순이 곪을 대로 곪아 불만 붙이면 터질 화약고와 같았다.
대구에 진주한 미군은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해산하고 친일관료들을 군정관리로 임명했다. 미군정은 김의균을 도지사로, 대구공소원장(지금의 고등법원장)과 검사장에 이호정과 한규용을, 대구지방법원장과 검사장에 함승호와 오완수를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에 판사를 역임한 자들이었다. 경북경찰청장에는 일제강점기 도회 의원을 지낸 조근영이, 그 후임에는 광복 직전까지 군수로 있던 권영석이 임명됐다. 대구경찰서장에는 박을수와 그 뒤를 이어 이성옥이 임명됐는데 둘 다 친일경찰로 민족운동을 탄압한 자들이었다. 친일경찰은 일제시기 악행을 버리지 못한 채 광복 후에도 여전히 고문, 구타 등을 자행해 지역 주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광복 후 대구경북 지역 주민들이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식량부족이었다. 1945년 경북의 쌀 수확량은 약 200만 섬이었다. 이 양은 도민들에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식량이 모자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햅쌀이 출하됐는데도 쌀값은 큰 폭으로 올랐다. 악덕상인들이 쌀을 사재기해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발표하고 1946년 2월부터 쌀을 수집했다. 강제공출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몰아친 쌀 수집은 농민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쌀 수집가격도 시중에서 암거래되는 가격보다 현저히 낮아 농민들이 수매에 응할 리 없었다. 자연히 수집실적이 저조했으며, 경북의 실적은 목표량의 7.3%에 불과했다.
농민의 불만은 더욱 증폭됐다. 하곡 수집은 일제 강점기 때도 없던 것으로 추진방식도 강제적이고 폭력적이었다. 하곡수집 실적은 전국적으로 평균 목표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8%에 머물렀다. 하지만 경북은 계획량의 74.4%를 기록했다. 이처럼 경북에서 유독 수집 실적이 높았던 것은 군정 관리와 경찰이 나서서 농가마다 할당량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실적이 저조할 경우 해당지역 관리는 문책을 당해야 했으므로 수집에 혈안이 됐다.
수매를 거부할 경우에는 경찰이 강제로 수매케 해 농민들과 충돌이 잦았다. 경찰과 관리의 압박에 못 이겨 자신의 가재도구를 팔아 하곡을 사서 할당량을 채우는 농민도 있었다.
언론계의 신문 제작 거부
시장에서 쌀이 자취를 감추고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쌀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1945년 11월 쌀 한 말은 140원에 거래되었다. 그러나 1946년 9월말에는 1500원으로 10배 이상 폭등했다. 시민들은 쌀을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공정가격으로 배급되는 쌀과 보리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 탓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46년 5월에는 콜레라마저 발생해 대구시민 120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또한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해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보았으며 교통도 두절돼 식량사정이 더욱 악화됐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시민들은 연일 도청과 부청으로 모여들어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기아(飢餓) 시위에 나섰다.
전평의 총파업은 대구지역 주민들을 완전히 새로운 상황으로 몰아갔다. 전평이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란 이름 아래 미군정 운수부(運輸部) 산하 전국 4만여 철도노동자를 앞세우고 총파업에 돌입한 것은 1946년 9월24일이었다. 파업의 선봉에 선 단체는 부산철도기관구였다. 부산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은 이미 9월15일 미군정청 운수부장 앞으로 제시한 임금인상, 일급(日給)제 반대 등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부분 태업으로 맞서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해답이 없자 다른 지역 철도기관구보다 하루 앞선 9월23일 0시를 기해 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24일 대구역 철도노동자 1000여 명도 파업에 돌입해 ‘대구철도쟁의단본부’를 조직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일급제 반대, 임금 인상, 쌀 배급 증대, 해고 반대, 급식 부활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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