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대장암, 십이지장암, 간암 이겨낸 전 YS 주치의 고창순 박사

“청년·장년· 노년기에 찾아온 세 번의 암, 투지와 배짱으로 정면돌파”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6-03-13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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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암, 십이지장암, 간암 이겨낸 전 YS 주치의 고창순 박사
    봄을 시샘하듯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2월7일, 고창순(高昌舜·74) 박사의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을 찾았다. 평생을 단독주택과 빌라에만 살다 몇 달 전 이사했다는 아파트는 신혼집처럼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부인 김정자 여사가 기자를 맞았다. 고창순 박사는 연달아 걸려오는 휴대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그가 암을 세 번이나 이겨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가 많아졌다. 고 박사는 자신의 암 투병과 극복 과정을 담은 책을 곧 출간한다.

    고창순 박사가 처음 암에 걸린 건 1957년, 일본 쇼와(昭和)의대 인턴으로 근무할 때였다. 만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였다. 그로부터 25년 뒤인 1982년, 고 박사에게 또 한번 암이 찾아왔다. 4년 임기의 서울대병원 부원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받은 건강검진에서 십이지장암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1997년, 서울대병원을 정년퇴임한 지 사흘 만에 간암 선고를 받았다. 그의 나이 예순다섯. YS 주치의 임기를 5개월 남겨둔 시점이었다.

    평생 단 한번도 걸리지 않길 바라는 암이 세 번씩이나 그것도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각각 다른 부위에서 발견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세 번 모두 암세포가 상당히 커진 상태에서 발견됐음에도 거뜬히 이겨내고 노후를 건강하게 보내고 있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런 고 박사를 사람들은 ‘오뚝이’ ‘부도옹(不倒翁)’이라고 부른다.

    통화를 마친 고 박사와 마주앉았다. 암을 세 번이나 이겨낸 ‘기적의 사나이’는 골리앗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윗에 가까운 작은 체구에 인상 좋은 할아버지다. 암을 세 번이나 물리친 그도 노화는 비켜갈 수 없었나 보다. 오른손이 약하게 떨렸다. 그러나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 재미있는 말솜씨는 그를 강인하고 젊어 보이게 한다.

    -박사님 이야기가 곧 책으로 나온다죠.



    “예,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책이 나오나 봅니다. 이 책은 의사로서 쓴 과학적이거나 교과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세 개의 독립된 암을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앓은 한 자연인의 ‘암 이력서’라고 볼 수 있어요. 내가 온몸으로 부딪친 경험을 그대로 밝혔거든요. ‘이렇게 해야만 암을 이길 수 있다’거나 ‘이것이 정도(正道)’라고 알려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잘못 생활하니까 암에 또 걸리더라, 그리고 암에 걸리면 다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더라 하는 이야기를 썼어요. 무엇보다 생활습관을 개선하면 면역력이 강화돼 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긍정적인 신념을 갖고 생활하면 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긍정적인 경험, 몸으로 부딪치는 힘, 이런 걸 강조한 암 환자의 소박한 이력서죠.”

    -세 번씩이나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

    “스물다섯 살에 암 판정을 받았을 때는 믿지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의료기기가 발달하지 않아서 수술한 뒤에도 ‘니들이 뭘 잘못 봤을 게다’라고 생각했어요. 암이라고 믿지 않았으니 갈등이란 게 있을 수 없었죠. 1982년 십이지장암 선고를 받았을 때는 첫째가 대학 2학년, 둘째가 고교 3학년, 셋째가 중학 3학년, 넷째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요.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상황인 거죠. 11시간에 걸쳐 십이지장과 위 절반 이상, 췌장 두부, 담낭과 소장 일부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했는데, ‘암세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당시 서울대병원 민병철 교수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이젠 내가 몸을 튼튼히 만드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3년간 모범생활을 했죠.

    그러고는 15년 뒤, 대통령 주치의 시절 또 한번 암이 찾아온 거예요. 1997년 9월3일 서울대 교수직을 퇴임한 지 사흘 뒤 ‘학교 떠나기 전에 건강검진이나 받아두자’는 생각으로 검사했는데 간암이 발견됐어요. 간 오른쪽에 야구공만한 암세포 덩어리가 있고, 왼쪽 부신(곁콩팥)에도 탁구공만한 암 세포가 있었어요. 이번에도 의료진을 전적으로 믿고 수술했죠.”

    ‘고 박사, 니 괘않겠나?’

    -간암이 부신까지 퍼졌다면 수술을 생각하기 어려운 상태 아닌가요?

    “그렇죠. 눈에 보이는 암세포를 모조리 제거한다고 해도 이미 다른 장기에 퍼져 있을지 모르는 암세포들이 언제 어디서 솟아나올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저는 만성 C형간염이 간경화로 진행된 상태였어요. 수술이 잘 된다 해도 간 기능이 회복되지 못해 죽을 수도 있는 거죠. 그러나 의사를 믿었어요. 서울아산병원 이승규 교수가 수술했는데, 간암 수술에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사인 데다 제 뱃속을 잘 알고 있었죠. 민병철 교수가 십이지장암 수술을 할 때 이승규 교수가 그 곁에 있었거든요. 그런 점에선 제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이 교수에게 ‘눈에 보이는 암세포만 잘 제거해라. 나중에 재발하는 건 내가 면역력을 강화해 이겨내겠다’고 말했죠.”

    1997년 9월23일 아침 8시30분에 시작한 수술은 저녁 6시가 되도록 본수술에 들어가지 못했다. 심하게 유착된 장을 박리하는 수술로 ‘교통정리’하는 데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수술은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16시간이 걸렸다. 고 박사는 “의료진의 정성이 대단했다”고 했지만, 당시 의료진은 고령에 그만한 수술을 견뎌낸 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에도 침대에 누운 채 침대 손잡이를 붙잡고 안간힘을 다해 몸을 뻗으며 운동했다. 발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는 것도 계속했다.

    -환자는 잘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더군다나 수술받은 암 환자라면.

    “그렇지 않아요. 수술 후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저는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글쎄, 의사로서는 좀 위험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체력은 한계가 느껴질 때까지 단련하는 게 좋다고 봐요. 제가 수술 후에 지나치다싶을 만큼 운동을 많이 한 것도 그럴수록 오히려 몸이 더 빨리 회복되는 게 느껴져서죠. 단 심장병이나 고혈압, 당뇨, 동맥경화가 있는 사람은 주의해야죠. 그런 문제가 없다면 몸을 한계 상황까지 활성화하면 육체도 그에 따라옵니다.”

    -간암 수술을 했을 때 김영삼 대통령 주치의를 맡고 계셨죠?

    “대통령 임기가 1998년 2월까지였는데, 제가 1997년 9월23일에 수술을 했어요. 수술하고 21일 만에 퇴원했는데, 그리고 얼마 안 돼서 대통령의 캐나다 방문 일정이 잡혔어요.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할 때 주치의가 수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제가 따라나섰죠. 그런데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염려하는 눈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참 낯 뜨거운 일이죠. 대통령께서 ‘고 박사, 니 괘않겠나’ 하는데,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네, 괜찮습니다. 걱정마십시오’ 했으니까요. 몸무게가 10kg도 넘게 줄어서 허깨비 같은 몰골이었는데, 그런 꼴을 하고 대통령 주치의라며 따라다니면 외국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거죠. 그런데 아프다고 위축되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 하려고 했던 배짱이 있었기에 제가 병을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낯 두꺼운 놈, 욕 많이 얻어먹는 놈이 오래 산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세상 눈치 보고, 감정을 억누르고, 갈등하는 게 다 병을 키우는 거죠.”

    화학요법, 신중히 선택해야

    고 박사는 일단 암이 발견되면 수술로 정면 돌파했다. 대장암도, 십이지장암도, 간암도 모두 수술로 암세포를 최대한 제거했다. 11시간, 16시간씩 걸리는 수술 후 그의 장기는 초토화됐다. 오장육부 중 지금 뱃속에 온전히 남아 있는 장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보통사람이라면 길이가 150cm에 이르는 대장은 거의 없어졌다. 십이지장과 위도 절반만 남아 있다. 담낭과 췌장도 일부 잘려나갔다. 간과 왼쪽 부신도 온전하지 않다. 이 때문에 동료 의사들은 그를 ‘사람이 최소한의 장기만 갖고 얼마나 잘 살 수 있는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실험인간’이라고 부른다.

    암 수술 후에는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자잘한 암세포들이 자라 다시 위협해 올 것에 대비해 항암 화학치료제를 투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는 화학요법에 전혀 의존하지 않았다.

    -항암 화학치료제를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장암 수술을 받았을 때는 항암 화학치료라는 게 없었고, 십이지장암 수술 후엔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없었어요. 간암 수술을 받은 뒤에는 내 의지로 항암 화학치료제를 맞지 않았죠.

    화학요법은 케이스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와요. 어떤 사람한테서는 암세포만 잘 죽이던 것이 다른 사람 몸에서는 정상세포까지 다 죽이기도 해요. 환자에 따라, 암 유형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죠. 그래서 항암 화학치료제를 쓸지 말지는 환자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라는 게 내 견해인데, 내 몸은 화학요법이 잘 듣지 않는 타입이었어요. 운동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죠.”

    대장암, 십이지장암, 간암 이겨낸 전 YS 주치의 고창순 박사

    스테퍼를 이용해 운동 중인 고창순 박사. 그는 수시로 몸을 움직여 체력을 단련한다.

    그의 간암은 다른 부위에서 발병된 암이 전이된 것이 아니라 간 자체에서 발병한 간 세포성 암이라 화학요법을 쓸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고 박사 자신이 항암 화학치료제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의료 관행과 환자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항암제는 세포를 죽이는 독이에요. 암세포만 죽여야 하는데 그 옆에 있는 정상세포까지 죽이죠. 그런 점에서 암을 이기는 데 세포 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암세포를 어떻게 공격해 없앨 것인가 고민할 게 아니라 면역력을 강화해서 암세포가 힘을 못 쓰도록 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죠. 우리 몸은 공격하는 요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저항하는 힘이 생겨요. 그것이 우주의 섭리이고, 대자연의 원리죠.

    그런데도 오늘날의 건강관리는 화학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맹점이죠. 전부 약에 의존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안 해요. 현대의학은 약의 노예가 되어 있어요. 의학은 본래 생체물리학에서 비롯된 생리학과 생체화학에서 비롯된 생화학으로 이뤄졌는데, 요즘은 생화학에만 의존하고 있다고요. 생리학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어요. 운동하면 건강해진다는 말이 생리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렇게 해서는 돈벌이가 안 되니까 의학이 생화학 쪽으로 편중돼 발달하는 거죠.”

    의사와 환자의 역할분담

    고 박사에게 암 치료의 대원칙은 현대 의학의 힘을 최대한 믿고 따르되, 환자 스스로 노력해서 면역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의사와 환자의 조화로운 역할분담을 강조한다. 의학의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환자 스스로도 주체성을 갖고 총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의학의 정도란 사이비 의료에 현혹되지 않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의술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 요인에 의한 발병이 대부분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고령화시대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암, 당뇨, 고혈압, 심장병은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게 의사와 환자로서의 경력이 ‘화려한’ 고 박사의 의견이다. 그는 “생활습관을 어떻게 하느냐가 병의 예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의사는 진료와 수술을 최선을 다해 하면 되는 거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건 내 몫이죠. 내 몸은 내가 책임지고 가꿔야 하니까요. 가꾸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공부해야 하는데, ‘의학의 ‘의’자도 모르면서 무슨 공부냐’ ‘돈도 없는데 알아서 뭐하냐’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꼭 알아야 할 것이 별게 아니에요. 운동하라는 거죠. 운동이라는 것도 반드시 헬스클럽에 가고, 골프를 쳐야 운동이 아니죠. 집안에서 계속 움직이고, 그렇게 움직이는 게 일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지혜를 가지면 돼요.

    자기 생활과 여건에 맞는 운동을 찾아서 그것이 내 면역력을 높여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실천하는 것이 하나고, 그 다음은 마음이 편해야 하죠. 늘 긍정적으로 생활하며 표정도 스마일이고, 마음의 자세도 미소 지을 수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우선 욕심이 없어야 해요.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믿어야죠. 정신적인 평화는 육체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죠. 거꾸로 마음이 불편할 때 운동을 열심히 하면 생각이 단순해져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죠. 생각이 복잡할 때 간단한 스트레칭이나 운동을 하면 머리에 쏠려 있던 피가 온몸으로 돌게 되니까요.”

    암 예방엔 열등생

    고 박사는 화학요법을 포기하는 대신 체력단련으로 면역력을 최대한 가동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수술을 받고 혼자 걷기 힘들 때도 아내의 부축을 받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는 요즘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전화를 받을 때도 이방 저 방 옮겨 다니고, TV를 보면서도 척추 운동을 하거나 스테퍼에 올라선다.

    “체력단련에 가장 중요한 건 적당한 운동이죠. 적당한 운동엔 늘 충분한 휴식이 세트로 따라다니고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균형잡힌 식사입니다. 먹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이 없어요. 균형잡힌 식사가 모든 약에 우선하죠. 무엇이든 다양하게 골고루 먹으면 됩니다. 어떤 약을 먹었더니 암이 낫더라 하는 건 전부 사이비예요.”

    부인 김정자 여사에 따르면 고 박사는 젊은 시절 술을 자주 즐겼는데, 밤늦게 만취해 돌아와서도 꼭 배가 부르게 밥을 먹고 잤다. 그랬던 그도 큰 수술 뒤에는 뭘 입에 넣어도 모래를 씹는 것처럼 까끌까끌해 도통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먹어야 산다’는 생각으로 우윳가루나 단백질가루로 연명하며 끊임없이 먹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고 한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다음엔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되 양을 좀 모자란 듯 먹는 편이다.

    -고 박사께선 암에 걸려서 싸워 이기는 건 잘하는데, 예방하는 쪽으론 영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암을 예방하는 데는 열등생이죠. 못된 생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면서 몸을 혹사했으니까요. 죄를 많이 지었으니 하늘을 원망할 자격도 없죠. 그 죄라는 게 몸을 학대했다는 거죠. 환자 진료에, 학생 교육에, 제자들 논문 지도로 바쁜 와중에도 저녁마다 사람들과 만나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웠으니까요. 극심한 육체적 소모와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니 그만한 결과에도 원망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죠. 원망하는 대신 반성했어요. 그래서 암 수술하고 나서는 3년 정도 모범적인 생활을 했죠. 술, 담배도 3년간 끊었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나면 생활이 다시 흐트러지더라고요.”

    -의사는 병을 잘 피해 갈 것 같은데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의사가 하라는 대로는 해도, 의사 하는 대로는 하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요. 십이지장암과 간암을 건강검진으로 발견했는데 그때도 아주 우연하게 건강검진을 받은 거지, 그전까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남한텐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말이죠. 내가 참 운이 좋아요. 암을 두 번씩이나 우연히 발견한 걸 보면. 그것도 암세포가 상당히 커졌을 때인데, 다른 부위로 전이되지도 않고….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꿀밤을 맞더라도 어쨌든 하느님이 빨리 데려가시지 않고 좀더 살게 내버려두시는 게 참 고맙죠. 암에 걸린 다음 모범생활을 하니까 그나마 봐주신 거죠. 암이 진행하고 재발할 때 환자가 어떤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예후가 달라진다는 가설을 정해놓고 실천했으니까요. 암세포가 자라면 그에 저항하는 면역 세포도 자랄 거다, 면역 세포의 힘이 세지면 암세포의 성장을 막을 수도 있을 거라고 믿고 모범적으로 생활했어요.”

    “정신은 아직 청년이요”

    -간암 수술 후엔 술·담배를 완전히 끊으셨다죠. 두 가지가 암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봅니까.

    “술은 적당히 먹으면 나쁠 게 없는데,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으로 이어져서 생활 습관을 무너뜨리니까 아예 피하기로 한 거죠. 담배는 몸에 해로운 것 같아요. 원인이 니코틴이든 타르든. 담배를 끊고 나면 건강이 좋아지는 게 확연하게 느껴지거든요. 그렇다고 그것 하나에 모든 죄를 덮어씌우는 건 문제가 있고, 총체적으로 접근해야죠.

    -그동안 가족들도 마음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부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나를 종교처럼 믿고 있어요. 제가 아내를 믿으니까 아내도 저를 믿는 거죠. 집안일이며, 아이들 문제며 전적으로 아내를 믿으니까요.”

    옆에 있던 부인 김정자씨가 거들었다.

    “본인이 의사고, 또 주위의 제자들이 알아서 다 해주니까 그대로 믿고 따랐죠. 근데 이상하게 여태껏 한 번도 남편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항상 ‘이 사람이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좀더 일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지,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안 했어요. 암이 몇 번 재발했을 때도 주변에서는 큰일났다고 걱정했던 모양인데, 우리는 뭐 별 염려 없었어요(웃음).”

    -요즘 건강은 어떠신가요.

    “나이가 많으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만큼 힘이 있진 않아서 간암이 가끔 재발해요. 지난해엔 균에 감염돼 좀 앓기도 했고요. 몸이 좀 약해지고, 기력이 떨어지긴 했는데 정신은 아직도 청년이에요. 허허.”

    때를 노렸다 한 방에 공격

    대장암, 십이지장암, 간암 이겨낸 전 YS 주치의 고창순 박사

    고창순 박사가 암을 이겨내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한 부인 김정자씨와 함께 인왕산에서.

    -암이 재발하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간암 수술 후 몇 차례 암이 재발했는데 다행히 다른 데로 전이되진 않고, 간에서만 발견됐어요. 암을 치료하는 데 가장 좋은 건 ‘조기 발견, 조기 제거’지요. 요즘은 진단 기기가 발달해서 초(超) 조기 발견도 가능해졌는데, 그렇게 빨리 발견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시기 전에만 암세포를 발견하면 제거할 수 있어요. 오히려 너무 서둘러서 항암제를 쓰면 정상세포까지 죽여버리게 되죠.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구별이 잘 되지 않으면서 중앙 통제를 받지 않고 무한 분열 성장하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 자라면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그 주변에 혈관을 발달시켜요. 내 경우엔 간 암세포에 혈액을 공급하는 간 동맥을 차단해버리는 간동맥색전술로 암세포를 죽였지요. 간동맥색전술은 혈관이 어느 정도 발달한 시점에 약을 써야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경과를 지켜봐요. 제 나름의 계산은 섣불리 화학요법을 써서 정상세포까지 손상시키는 대신, 때를 노렸다가 한 방에 공격해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거죠. 그 사이 내 몸을 튼튼하게 함으로써 면역력을 강화해 암을 눌러버리면 더 좋고요.”

    -1998년, 2000년, 2004년, 2005년에 자꾸 간암이 재발했을 땐 한번쯤 화학요법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여러 번 재발하니까 화학치료제를 맞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죠. 그런데 그럴수록 몸을 더 튼튼하게 관리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만에 하나 다른 곳으로 퍼져 잘못됐을 때 죽음을 맞이할 각오는 늘 하고 있고요.”

    -암 환자 스스로 화학요법이 자신과 잘 맞는지, 맞지 않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의사가 항암 화학치료의 한계를 일러주면 환자 자신이 잘 따져보고 결정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선 의료진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돼야 해요. 오픈 마인드 상태로 대화해야 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에겐 잘 묻고 얘기하면서 의사와는 대화를 안 해요. 그게 문제죠. 환자는 의사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믿기 위해서는 납득이 돼야 하니까 의사에게 무엇이든 허심탄회하게 물어야죠. 환자가 물었을 때 귀찮다는 반응을 보인다면 좋은 의사가 아니죠. 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의사는, 서비스는 기생처럼 진료는 성직자처럼 해야 한다’고 가르치거든요. 의사는 환자가 아무리 무식한 질문을 해도 사랑으로 돌봐줘야죠. 의사의 말이 의심스러울 때는 다른 권위자에게 제2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고요.”

    고 박사는 어느 쪽으로든 일단 결정을 내리면 믿음을 가지라고 강조했다.

    의사의 서비스는 기생처럼

    “인생이라는 게 외나무다리를 걷는 건데 이런 선택을 했다가 잘못되면 어쩌나, 내가 저걸 하지 않아서 죽으면 어쩌나 하는 미련은 버리고, 결정한 걸 우직하게 밀어붙여야 해요.”

    -암 환자들로부터 연락이 많이 오죠?

    “아침마다 전화하는 분도 계세요. 비실비실 누워 있으면 본인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도 힘드니까 자꾸 운동하고, 잘 먹어야 한다고 얘기하죠. 그렇게 성의껏 조언하는 게 어찌 보면 하나의 봉사일 수 있고, 나 자신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상기시키고, 또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되죠.”

    상담을 청하는 암 환자들에게 고 박사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죽을 준비부터 해라”다.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암에 기죽지 않기 때문. ‘이렇게 자꾸 암이 재발하는데, 이러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암을 더욱 기세등등하게 만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죽음에 초연해지려면 죽음에 대한 나름의 철학, 정의 같은 게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선 종교를 갖는 게 좋은 방법이죠. 어떤 종교든 기본은 내세를 인정하니까요. 형태는 저마다 다르지만 일단 내세를 전제하고 나면 죽음을 평화롭게, 희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렇게 암에 절대 위축되지 않도록 정신적으로 무장한 다음엔 열심히, 즐겁게 체력단련하면 됩니다. 저는 체력단련을 ‘뛴다’고 표현하는데, 여유 있는 사람은 골프를 칠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조건 걸으면 되죠. 스트레칭, 심호흡, 지압, 목욕…이 모든 것이 체력단련이 될 수 있어요. 생활 속에서 육체적으로 단련하는 거죠.”

    고 박사에게 비방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그의 부인은 한 번도 암에 기죽어본 적이 없다. 암이 찾아왔을 때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섣불리 죽음을 염려하지도 않았다. 지난 생활을 반성하고,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는 데 몰두했다. 고 박사는 인터뷰 내내 진지했지만 자주 웃었다. 중간 중간 부인과 대화를 나눌 때면 반드시 까르르 웃음이 터져나왔다. 암은 오히려 그들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린 듯했다.

    “어려서부터 어디서든 남한테 지는 걸 정말 싫어했어요. 골목대장을 안 하면 학교 가기도 싫어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욕심이 다 사라졌어요. 지금 이렇게 아담한 집에서 마누라하고 웃으면서 사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해요. 오늘도 아침에, 우리 마누라한테 ‘천국에 가서도 영원한 동반자가 됩시다, 마누라 김정자 여사한테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했더니 (아내가) 도망가겠다고 하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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