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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⑨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사랑의 이름으로’ 가정 버린 당대의 예술가, 과연 용서해야 하나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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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의 도피행각’

안기영의 캐리커처.

하루는 상하이로 탈출하려고 부산행 차표를 사서 경부선 열차에 탔다가 대구에서 되돌아왔다.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달 후에는 신징으로 가려고 북행열차를 탔다가 사리원에서 되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느냐는 아내의 힐책에 안기영은 몸을 피할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 있다고만 얼버무렸다. 도피에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김현순을 잊고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안기영은 아내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다.

“내가 사라지거든 가사 일체를 정리해 가지고 친정 근처에 가서 살아요.”

이화여전을 졸업한 김현순은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을 준비했다. 김현순의 부친은 서울에서도 내로라하는 갑부였다. 김현순이 유학을 떠나면 안기영은 더는 서울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도원 같은 곳에서 기계적으로 교편을 잡는 것보다는 좀더 자유롭게 예술혼을 떨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는 하얼빈에 있는 친구 변홍규 목사를 생각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면 러시아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1932년 4월11일, 안기영은 150원과 트렁크 하나를 챙겨 북행열차에 올라탔다. 아내는 물론 김현순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얼빈에 도착하니 홀가분해지기는커녕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하얼빈 변홍규의 집에서 나는 괴로워 밤잠을 못 잤습니다. 외로운 기러기같이 짝 잃은 현순이는 어떻게 지내나. 나를 믿고 따르던 내 제자들은 어찌할까. 마음속의 가시바늘은 때때로 내 심장을 요리조리 찔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참다못해 그곳에 있다는 것을 현순이에게 편지해 알렸습니다. 얼마 후 현순이에게서 전보가 왔습니다. 하얼빈으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더욱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남이 애지중지 기른 딸! 장래가 촉망되는 조선의 소프라노가 나 때문에 혹시 장래를 그르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나는 눈물로 참회했습니다. 허나 끓어오르는 사랑의 정열은 참을 길이 없어 신징으로 마중 가려고 변홍규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변홍규는 “가정불화는 이해하지만 연애방랑이야 어디 말이 되오?”하며 못 가게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가슴 속엔 사랑 그것이 벅차올라 현순이를 맞으러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네는 목사요 나는 예술가일세.”

한마디 말을 던지고 나는 표연히 현순이를 맞으러 갔습니다. 북만(北滿)의 봄빛이 아직 오지도 않은 찬바람 치는 이역에서 그를 만날 때 우리는 서로 붙들고 포옹하고 눈물 속에서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안기영·김현순 탈출 방랑기’, ‘조광’ 1936년 4월호)

신징에서 김현순과 재회한 안기영은 러시아 유학을 포기하고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병원을 개업한 김현순의 오빠를 찾아가 여비라도 넉넉히 얻어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현순의 오빠를 찾아갈 때만 해도 같은 젊은이로서 그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오빠는 “나는 안 선생을 믿었는데…” 하며 안기영을 싸늘하게 대했다. 김현순에게는 “너는 정말로 그이를 사랑하느냐” “헤어질 수는 없느냐”며 갈라설 것을 강권했다. 밀라노로 갈 여비라도 얻으려던 안기영과 김현순은 상하이로 발길을 돌렸다.

고난의 도피생활

상하이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은 상하이에서 가장 허름한 단칸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살림이라곤 식기와 화덕이 전부였다. 중국 여배우를 상대로 음악 개인교습을 했지만 수입이 신통치 않았다. 성격 급한 여배우들은 몇 달 교습을 받고도 노래솜씨가 나아지지 않자 교습을 그만두었다. 돈이 궁해 찬도 없는 밥을 지어먹고, 딱딱하고 거친 침대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백만장자의 딸로 태어나 고생 한번 하지 않고 자란 김현순의 충격은 엄청났다. 평생 사랑하고만 살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는 처음 떠날 때 약간의 돈이 있었으나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오자 돈이 떨어졌지요. 그래서 상하이의 1년 반은 그야말로 퍽이나 고생을 하였지요. 상하이 있을 때가 가장 고생이었지요. 그렇게 고생을 하던 때 어떤 ‘댄스홀’에서 마침 흑인가수가 월급을 더 많이 주는 다른 데로 옮겨가고 자리가 비었는데 나에게 월급 450원을 줄 테니 오라고 했어요. 나는 딱 잘라 거절해버렸지요. 아무리 생활이 궁하기로서니 나의 예술가적 양심을 그렇게 쉽사리 팔아버릴 수야 있느냐 하는 생각이었지요. (‘안기영 김현순 연애사건’, ‘삼천리’ 193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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