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광’ 1932년 1월호에 최영숙이 세계 20여 개국을 여행하고 귀국한 감상을 적은 글, ‘대중의 단결’. 사진은 아테네 유적지에 서 있는 최영숙.
“경기도 여주군 태생으로 방년 21세 된 최영숙 양은 지난 7월13일 밤 하얼빈에서 구아연락열차를 타고 멀리 스웨덴을 향하여 떠났다. 최영숙 양은 사회과학을 연구하려고 단신으로 만리타국으로 간다고 한다. 지난 9일 기선(汽船)을 타고 상하이를 떠나 다롄에 상륙했을 때, 최영숙 양은 일본경찰에게 잡혀 큰 고초를 겪었다 한다. 그는 후일 고국에 돌아와 몸과 마음을 오로지 고국에 바치기 위해 이 같은 고생을 무릅쓰고 공부하러 멀리 떠난다 한다. 그는 나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일어와 중국어, 영어에 정통하고, 매사에 재주가 뛰어나다. 최근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한다 하며, 이번에도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을 많이 가지고 가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한다.”(‘동아일보’, 1926년 7월23일자)
최영숙은 난징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스웨덴에서 최영숙은 엘렌 케이를 만나지 못했다. 엘렌 케이는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출발하기 석 달 전인 1926년 4월, 이미 고인이 됐기 때문이다.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
최영숙은 엘렌 케이의 돌연한 죽음에 낙담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스웨덴어를 배우고 학비를 벌어 대학에서 공부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최영숙의 부친이 포목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곤 하나 딸의 유학비를 감당할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떠나기 직전, 그의 부친은 명태 무역에 손을 댔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부친은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해 여주를 떠나 서울 홍파동 빈민가로 이주했다. 난징 유학 시절 최영숙은 집에서 얼마간 학비를 타 쓰기도 했지만, 스웨덴에서는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영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고, 난징에서 한두 달 버틸 수 있는 돈을 가져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처음 스웨덴 땅을 밟았을 때, 나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어쩔 줄 몰랐습니다. 스웨덴의 풍경은 내가 어릴 때 지리를 배우며 상상하던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언어와 풍속이 너무 다르고 아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어찌 외롭고 쓸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한 달 동안은 밤이나 낮이나 울기만 했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울기만 해서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겨우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톡홀름 인근 시골학교를 찾아가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개월 간 스웨덴어를 배워가지고 가을 학기에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서전 대학생 생활’, ‘삼천리’, 1932년 1월)
최영숙은 시골학교 청강생 신분으로 낮에는 스웨덴어를 공부하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자수를 놓았다. 베갯잇 하나를 수놓으면 5, 6원의 수입이 생겨 그다지 힘들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금까지 할 여유가 생겼다.
1927년 스톡홀름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황태자 도서실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1926년 아돌프 황태자가 아시아 곳곳을 돌면서 수집해온 자료의 목록을 작성하고 중요 내용을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 능통하면서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아는 최영숙은 학구열이 왕성한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황태자 도서관에서 일한 덕분에 최영숙은 스웨덴 지식인들과 폭넓게 사귈 수 있었다. 1935년 스톡홀름대학 자연과학부 학장 스텐 베르크만 박사가 동식물 표본 수집차 조선을 방문했을 때 ‘미스 최’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베르크만 박사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미스 최’를 안다고 했다. ‘미스 최’는 연전에 스웨덴에서 경제학 학사학위까지 받아가지고 귀국했지만 불우한 날을 보내다가 요절한 최영숙씨를 말한다. 기자가 그는 죽었다고 말하니 대단히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스 최는 스톡홀름 박물관에서 수삼차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를 통해 조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스 최는 황태자 도서실에서 동양 서류 정리 업무를 얼마간 보았는데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조선일보’, 1935년 2월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