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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선생님

일평생 여성 위한 법률활동으로 이어진 사제의 연

“네가 왜 방송국에 있느냐, 상담소에 와야지”

  •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 kbh@lawhome.or.kr

일평생 여성 위한 법률활동으로 이어진 사제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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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여성 위한 법률활동으로 이어진 사제의 연

이태영 선생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여성문제와 가정문제에 주목하여 상담소를 운영한 여성운동 선각자였다.

상담소에 와서 상담위원으로 일하며 또 다른 업무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30년사’ 편집 실무를 병행할 때였다. 당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나면서 많은 기자가 거리로 밀려날 때였다. 선생님은 그 상황을 매우 안타까워하셨고, 아까운 인재를 한 사람이라도 도와야겠다며 동아일보 해직기자 두 사람을 나와 함께 일하도록 해주셨다. 함께 일하던 그 기자들의 동기 송년모임에 초청을 받아 나갔다가 그곳에서 유일한 미혼이던 김종철씨(전 연합뉴스 사장)를 만나 이듬해 5월에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까지 후회 없이 살아오고 있다.

우리가 결혼한다고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곽배희는 내가 쓰려고 키운 사람이라 아무하고나 결혼시킬 수 없다. 그래서 결혼한다길래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그 뜻을 높이 사는 동아투위 사람이라니 마음이 놓이고 기쁘다. 평등하게 모범적인 가정을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제자 하나 하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그 마음이 짐작되어 더욱 기뻤던 기억이 새롭다.

해직기자였던 남편은 결혼 후에도 반독재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그 일로 계속 수배를 당하고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도 보안사 요원들을 피하느라 일주일간이나 상담소에 출근하지 못했고, 때로는 형사들이 상담소 복도에 진을 치고 있기도 했다. 또한 남편이 투옥 중일 때에는 일주일에 세 번 한나절씩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상담소에 상당한 부담과 염려를 끼치는 것이었지만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이와 관련해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를 적극적으로 감싸주고 옹호해주셨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 엄혹한 시절을 내가 어찌 겪어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직도 우리 부부가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다.



이렇듯 선생님은 업무와 관련해 엄격하기 그지없는 분이셨지만,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깊이 살펴 배려하는 분이셨다. 물론 당신 자신도 일찍부터 조국의 통일과 사회 민주화에 앞장섰기에 동지적 입장으로 우리 부부를 믿어주고 지켜주셨던 것이리라.

또한 선생님은 민주당 총재를 지낸 정일형 박사의 아내로 가정생활에서도 우리에게 모범이 되셨다. 정일형 박사에 대한 선생님의 신뢰와 넘치는 애정은 ‘부부는 저래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가르침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선각자

2005년 3월2일, 호주제 폐지를 담은 민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958년 민법 제정 당시부터 논란이 되어왔던 호주제를 가족법 개정운동 반세기 만에 드디어 역사의 뒤편으로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감격적인 순간에 당연히 선생님이 떠올랐다. ‘이 순간을 선생님이 보셨어야 하는데,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하신 선생님은 이와 관련해, 일찍이 “국회의원과 정부 그리고 남성들이여. 민주주의 완성의 정도(正道)는, 또 지름길은 가장 만만하게 여기는 안방에서부터의 평등·평화에 있다는 사실을 더 늦기 전에 분명히 인식하기 바랍니다”고 말씀하셨다.

상담소에서 평생을 보내며 또 선생님의 뒤를 이어 상담소 소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나로서는, 주요한 고비마다 선생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탁월한 선견지명, 놀라운 혜안, 늘 시대를 앞서간 생각들을 존경해마지않는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그 시대에 선생님은 여성문제와 가정문제에 주목하여 여성법률상담소를 만드셨다. 개인적으로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최초의 여성 변호사라는 지위를 팽개치고 가난하고 억울한 여성들을 위해 상담소를 만들어 가정의 민주화와 사회복지를 위한 토대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 보아도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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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 kbh@lawhom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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