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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 원류 탐험기 ⑦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 ‘남부인의 聖戰’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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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4월이 되면서 섬터 요새의 생활필수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앤더슨은 연방정부에 보급을 요청한다. 이에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구호품을 보내는 원정대를 파견할 것이라고 통고한다. 연방의 고수를 선언한 링컨은 섬터 요새에 구호품을 보냄으로써 연방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링컨의 통고를 받은 남부연합 정부는 딜레마에 빠진다. 만약 북부 원정대가 섬터 요새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스스로 주권을 포기하고 연방정부에 굴복하는 것이 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여 전쟁이 발발한다면 연방을 와해시킨 책임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제퍼슨 데이비스의 남부연합 정부는 논란 끝에 결국 물러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남부연합군 찰스턴 지역 사령관인 피엘 보리가드 장군에게 필요하면 무력을 사용해 섬터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그리하여 4월11일 보리가드는 앤더슨에게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앤더슨이 이에 불응하자 보리가드는 4월12일 새벽 마침내 인근 커밍스포인트 진지의 포격을 시작으로 섬터 요새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해서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전체 인구 2% 사망

찰스턴 항을 떠난 유람선은 약 40분 만에 섬터 요새에 당도했다. 배가 정박하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여성 둘이 계류장과 요새를 잇는 다리로 달려나와 승강대를 댄다. 군인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국립공원관리소의 직원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다리를 건너서 요새의 입구에 모여 관리인에게 요새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섬터 요새는 남북전쟁 이후 내내 군사시설로 남아 있다가 1948년 이후부터는 국립공원관리소에 이관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 오늘이 바로 앤더슨 소령이 모울트리 요새에서 섬터 요새로 수비대를 이동한 날이었음을 환기시킨다.

앤더슨 소령은 남부연합군의 사면공격을 처음에는 잘 견뎌냈다. 그러나 포대의 다수가 파괴되어 응전 능력을 상실하고, 병사용 숙사가 잿더미로 변하자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남부연합군에 항복할 뜻을 전했다. 공격이 시작된 지 34시간 만의 일이었다. 1861년 4월14일 일요일, 앤더슨은 섬터 요새를 남부연합군에 내주고, 웨스트포인트에서 한때 자신의 휘하에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남부연합 사령관 보리가드의 관대한 조치 덕분에 무기를 든 채 수비대원을 이끌고 북부로 철수할 수 있었다.



섬터 요새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북부 전역은 남부에 대한 분노의 함성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링컨은 이튿날 즉시 국가 변란을 선언하고 이를 진압할 7만5000명의 지원병 모병을 시작했다. 남부 연합 대통령 데이비스도 이에 대응해 10만명의 민병대 모병을 선언했다. 전쟁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가 잇따라 연방 탈퇴를 선언하여 남부연합은 11개 주로 늘어났다. 남부연합 정부는 5월에 그 상징성을 고려해 수도를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로 옮겼다. 노예주 가운데, 메릴랜드,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가 우여곡절 끝에 연방에 남아 있게 된 것은 북부에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본격적인 남북 접전의 첫 전투인 버지니아 주 마나사스의 불런 전이 시작된 것은 섬터 요새가 함락된 지 3개월 뒤인 6월21일이었다.

남북전쟁은 상대의 군사력은 물론 사람들의 전쟁 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전 영토를 대상으로 삼은 총력전이었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피해가 커진 이유의 일부도 이에 연유한다. 사실 개전 당시에는 남북전쟁이 4년이나 끌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섬터 요새를 뺏긴 다음 링컨이 7만5000명의 모병을 하면서 징집 기간을 불과 3개월로 한정한 것이나, 이에 대응한 남부연합군 민병대 모병의 경우 그 기간이 1년이었음이 그 증거다. 북부는 북부대로 남부는 남부 나름으로 각각 단기간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객관적 전력에서는 북부가 단연 앞섰다. 우선 인구 면에서 북부가 2200만인 데 비해 남부는 900만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350만이 흑인 노예였다. 산업에서도 남부는 북부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다. 북부는 섬유, 화약, 철강, 석탄, 곡물, 조선 등 국민총생산의 90%를 차지했으나, 남부는 미국 전체 생산량의 96%를 차지하는 목화 생산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었다. 기간산업시설이나 수송 체계 또한 남부는 북부에 비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제반 여건의 우세로 북부인 대다수는 전쟁이 단기간에 북부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인적·물적 자원에서 남부연합군은 북부에 비해 뒤졌으나, 전쟁이 자신의 땅과 재산, 가정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남부의 전쟁 의지나 병사들의 사기는 북부보다 훨씬 높았다. 또한 전통적으로 공동체 중심으로 생활해온 남부인들은 결집력이나 지역협력 면에서 북부보다 상대적으로 뛰어났고, 지방마다 민병대 조직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전쟁터가 남부지역이었기 때문에 남부는 또한 현지 사정에 밝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이처럼 전반적인 전쟁수행 능력이 호각지세(互角之勢)였기에 남북은 개전 후 처음 1년간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4년간 지속된 남북전쟁의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남북 합쳐 모두 210만명의 병력이 동원된 전쟁에서 사망자만도 북군 36만, 남부연합군 26만, 도합 62만명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미군 사망자 11만5000명,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 31만8000명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 더 구체적으로 이는 당시 미국 전체 인구의 2%에 해당하는 숫자요, 베트남전쟁을 포함해 미국이 치른 각종 전쟁의 사망자 총합계보다 많은 숫자다. 남북전쟁은 나폴레옹이 첫선을 보인 대량 징집, 최신 기술 공학을 응용한 각종 전술 무기의 동원,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활용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전이었다. 그러나 남북 양 진영의 군사 지도부가 이 같은 전쟁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전쟁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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