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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 원류 탐험기 ⑧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230년 후,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의 현주소는?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독립혁명의 발원지, 보스턴·렉싱턴·콩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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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3월에 터진 ‘보스턴 학살’은 이런 불신과 긴장이 폭발한 결과였다. 식민지의 격렬한 반응에 영국 정부는 한발 물러나 1773년에는 차를 제외한 모든 물품에 대해 수입 관세를 철폐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이런 미봉책에 만족하지 않았다. 1773년 12월 동인도회사의 수입 차를 싣고 온 배를 영국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총독에게 요구하던 보스턴 식민자들은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올드 사우스 교회에 모여 집회를 연 다음 모호크 인디언 복장을 한 채 동인도 회사 선박에 난입해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다에 내던졌다.

‘보스턴 차 습격단(Boston Tea Party) 사건’은 영국 지도층을 격앙시키기에 충분했다. 식민지를 강압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을 등에 업고 영국 정부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의회는 곧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주의 자치권을 몰수해 모든 관리를 총독이 임명하고, 재판권을 회수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군대의 주둔비용은 민간인이 부담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강압법(Coercive Act)을 통과시켰다. 이와 함께 토머스 게이지 장군을 사령관 겸 새 총독으로 임명하고 4개 연대를 보스턴에 파견했다.

어머니의 나라에 총을 겨누다

사태가 심각하게 전개되자 아메리카 식민지는 1774년 본국 정부의 이런 강경 조치를 논의하기 위해 전 식민지 대표자 회의, 곧 제1차 대륙회의를 소집했다.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 주에서 파견한 대표자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대륙회의가 열리는 동안 매사추세츠 주민들은 한편으로 지역 읍민회의를 소집해 각 식민지에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중지하고 강압법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영국의 군사행동에 대응하여 자체 방위를 할 민병대의 구성을 결의했다. 매사추세츠 읍민회의 결정 사항은 즉시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에 보내졌고 대륙회의는 이를 추인했다.

사태가 극단으로 치닫자 대륙회의에 참석한 일부 보수적인 지도자들은 영국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이들은 각 식민지의 대표자로 식민지의회를 구성하고, 그 수장은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의 중재안을 마련해 식민지가 반대하는 것은 억압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의회이지 국왕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국왕인 조지 3세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청원서를 내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이런 타협안은 이미 식민지를 반란 상태로 규정하고 이를 진압할 군사작전을 고려하던 영국 정부도, 단절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식민지 자체에서도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775년 4월18일, 게이지 장군은 마침내 군사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이미 본국 정부로부터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주동자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아놓고 있었다. 게이지는 프랜시스 스미스 중령의 지휘하에 2개 중대 700명을 발진시켜 렉싱턴에 숨어 있는 새뮤얼 애덤스와 존 행콕을 체포하고 민병대가 콩코드에 비축해놓은 화약을 몰수할 것을 명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보스턴 자유의 아들 지도자 조지프 워런(Joseph Warren)은 폴 리비어를 렉싱턴으로 급파, 두 지도자에게 영국군의 군사행동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이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는 또 리비어가 체포될 것에 대비해 윌리엄 도즈(William Dawes)에게도 같은 임무를 부여해 다른 길로 렉싱턴으로 출발하게 했다. 리비어는 영국군이 찰스 강을 이용해 수로로 보스턴을 출발할 경우와 육로로 행군할 경우를 상정하고, 전자일 경우에는 올드 노스 교회의 첨탑에 등불을 2개, 후자인 경우는 1개를 걸도록 종지기에게 부탁하고 보스턴을 떠났다. 보스턴에서 배를 타고 찰스턴으로 간 다음 콩코드까지 밤새워 파발마를 달린 리비어의 이 주도면밀한 행동은 훗날 ‘폴 리비어의 달리기’라는 롱펠로의 시에 담겨 인구에 회자됐고, 올드 노스 교회에 걸렸던 등불 또한 ‘자유의 등불(Liberty Light)’이란 이름으로 콩코드 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독립의 횃불 들어올린 민병대

1775년 4월19일 새벽, 게이지 장군이 출동시킨 700여 명의 영국군 정규군이 렉싱턴 코몬 근처에 당도했을 때, 인근에서 출동한 80여 명의 민병대가 이들과 맞섰다. 영국군 장교가 민병대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요구하자 민병대 장교 찰스 파커 대위는 수적으로 맞설 수 없다고 판단, 부하들에게 해산하라고 명했다.

이 순간 누군가가 총을 발사했다. 그와 동시에 교전이 시작되고 육박전이 벌어졌다. 독립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 발포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역사가 대다수는 전쟁에 참여했던 당시 병사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영국군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첫 전투에서 민병대원 8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당했다. 영국군은 부상자가 한 명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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