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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⑭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모던 걸’들의 호사스러운 소비문화가 잉태한 조선 최초의 ‘왕따’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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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실을 나온 문창숙은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로 향했다. 약속한 오후 1시, 문창숙은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뒷산으로 뛰어올랐다. 그것이 문창숙의 대답이었다.

들끓는 여론

오전까지만 해도 수업을 받던 학생이 오후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론은 거세게 들끓었다.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이, 박애와 평화의 낙원으로 알려진 기독교 여학교에서 친구들의 따돌림과 교수들의 강압적 태도에 시달리다 자살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목을 맨 문창숙을 나뭇가지에서 끌어내렸을 때 체온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아무리 어린 여학생들이기로 ‘징그럽다’고 살릴 수 있는 목숨을 죽였냐는 질타였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 한 기자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문창숙을 끌어내린 이화여전 교목 김인영 목사를 찾아가 당시 정황을 물었다. 김인영 목사는 당시의 비참한 광경을 회상하는 듯이 잠깐 동안 어두운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김 목사 : “참 무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때 광경을 무엇이라 말로 할 수 없지요. 너무도 황급하여 곧 내가 문창숙 양의 목을 풀어놓았습니다. 몸과 손발을 만져보았더니 아직 따듯한 체온이 있더군요. 그래서 학교 간호부를 시켜서 주사를 놓았습니다. 생전 처음 참혹한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기자 : “일반 풍설은 문창숙 양의 죽음을 보고도 흉하고 징그럽다고 하여 그의 목을 끌러놓지 않고 필경은 목사님을 청하여 그의 목을 끌러놓았다고 합니다. 일각이라도 빨리 문창숙 양의 목을 풀어놓았으면 혹시 문창숙 양이 죽지 않았으리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김 목사 : “천만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누구나 인정을 가지고서야 그의 목을 아니 끌러놓겠습니까? 나는 그날 마침 점심을 먹는데 김상용 선생이 뛰어 들어오며 문창숙 양이 죽는다는 유서를 써놓고 나갔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일대 소동을 일으켜 학교에서는 조를 나누어 문창숙 양의 행방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학교 뒷산에서 문창숙 양의 죽음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기자 : “그래 목사님께서 처음으로 문창숙 양의 죽음을 발견하셨습니까?”

김 목사 : “다 함께 보았지요. 여러 선생님들이 다 같이 보았습니다.”

하고 김 목사는 좀 우물쭈물한다. 기자는 좀더 사건을 추궁하려 했으나 김 목사는 말을 다시 계속하며,

“이렇게 오셨으니 좋은 말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우리 학교의 중대사건이지요. 이런 일이 생기기는 처음입니다.”

하고 방어진을 친다. 기자는 회담을 끊고 이화여전을 나오게 되었다. (‘문창숙 양의 목을 끌러놓은 김 목사의 말’, ‘조광’ 1937년 3월호)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문창숙의 죽음을 재촉한 문제의 괴투서(우)와 문창숙의 필적(좌).

신중하지 못한 투서 처리도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투서의 필적이 문창숙의 필치와 비슷하다고 문창숙을 죄인 문초하듯 다그친 것도 교육자로서 올바른 조치가 아니었다. 설령 투서가 문창숙의 자작극이었다 해도 한밤중에 기숙사생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투서를 받아쓰게 한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문창숙이 투서자라고 해서 그가 친구 돈을 횡령한 사실이 확인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듯 비판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서화가요 필적 감정의 권위자인 이한복은 문창숙의 필적과 투서의 필적을 감정하겠다고 나섰다. “절대로 같은 사람의 필적이 아니다”라는 그의 단언에 이화여전은 더욱 궁지에 내몰렸다.

당시 여학생의 자살은 흔하디흔해 사건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자살의 태반은 실연을 비관해 결행한 정사(情死)였다. 문창숙처럼 친구들의 따돌림과 교수들의 강압적 태도를 못 이겨 목숨을 끊은 경우는 흔치 않았다.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이화학당을 창설한 이래로 최대의 위기였다.

문단의 질타

문제의 이화여전 문과학장 김상용 교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남으로 창을 내겠소’(1934)를 지은 바로 그 시인이었다. 문창숙의 사건이 사회 문제로 비화되자 김상용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가장 먼저 회초리를 빼든 이는 문단의 좌장 이광수였다.

문창숙이 돈 20원을 횡령한 혐의로 자살했는데, 사감과 문과학장이 문창숙에게 부정한 혐의를 넘겨씌운 것이 자살의 근본 원인이다. 사감은 익명 투서의 필적을 문창숙의 필적이라고 단정하고 문과학장은 사감의 보고대로 문창숙을 불러서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매 문창숙은 한번의 죽음으로써 김상용 교수와 박은혜 사감의 단죄에 항변한 것이다.그날 1교시 수업 후에 문과학장 김상용 교수는 문창숙을 불러서 무슨 말을 했기에 문창숙으로 하여금 ‘오후 한 시에 회답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만들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죽은 이는 말이 없으니 김 교수의 양심에 맡길밖에 없다. (이광수, ‘문창숙 자살 사건에 대한 비판’, ‘조광’ 193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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