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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밀착취재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포용과 융합의 용광로인가, 서울로 향하는 임시정거장인가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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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의 고향 仁川

송현동 일대는 가난한 이주민들의 첫 정착지였다. 지금도 곳곳에 달동네 흔적이 남아 있다(왼쪽). 오른쪽은 인천의 첫 이주민이라 할 수 있는 화교들의 집단 거주지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한 한국 노인은 화교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지. 개항 때는 부녀자를 잡아다 간을 빼먹는다는 말이 있었고, 내가 어릴 때도 밤에 혼자 다니는 아이들 잡아다 판다는 말이 있었거든. 물론 밤에 못 돌아다니게 하려고 어른들이 지어낸 말이지만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어. 게다가 중국인에 대한 괜한 우월감이 있었어. 우리도 못살았지만 화교들은 더 못사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래서 ‘떼놈’이라고 놀렸어. 자기들이 하도 ‘대국(大國)’이라고 내세우니까 ‘대’자에 악센트를 줘서 떼놈이라고 부른 거지.”

한 중국음식점에 들어갔다. 자장면 값이 3000원이니 싼 편이다. 40대 후반의 사장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화교가 한국에서 취업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도 운 좋게 중국무역을 하는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에서 제일 먼저 잘리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자장면집말고는 없습니다.”

그는 인천에 애정도 있지만 서운함도 크다고 했다.



“어려서 ‘짱꿰’라고 놀림받았습니다. 자장면과 발음이 비슷해 우리를 비꼬아 부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놀림 받는 게 싫어 대만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차별을 받았어요. 우리를 ‘꺼우리방(고려방)’이라고 놀렸습니다. ‘난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인천 화교협회 사무실을 찾았다. 언덕 위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1960년대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실내 장식은 물론 사무실 책상, 의자, 캐비닛 등 소품 하나하나가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운 낡은 것들이었다. 화교협회에서 일하는 노효만(26)씨는 젊은 화교들의 고민을 들려주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고민이 많아져요. 나는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취직 고민…. 한국에선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어려워요. 그렇다고 중국보다는 한국에 더 익숙한 우리들이 대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그렇고…. 그래도 저나 제 친구들이나 결혼은 한국인이 아닌 화교와 하고 싶어해요.”

피란민 몰려 살던 ‘똥마당’

자유공원에 올랐다. 자유공원은 서양인들이 이 땅에 만든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냉전의 유물을 간직한 공원이 됐다. 공원 한 켠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희환(40)씨에 따르면 당초 시민단체에서는 맥아더 동상 철거가 아니라 송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의 이전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철거 주장이 나오면서 이념 문제가 덧씌워졌다는 것.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증거다.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세 노인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고향을 물으니 황해도와 함경북도라고 했다. 인천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이북 실향민이 많이 살고 있다. 인천이북5도민회에서는 인천 거주 이북실향민 가족(2, 3세 포함)이 77만여 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장회준(80)씨는 서울의 금융기관에서 일하다 전쟁을 맞았다고 한다.

“피란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서울로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 다행히 인천에 내가 다니던 회사 지점이 있어 이곳으로 왔지. 그래도 난 직장이 있어 크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아무것도 없이 내려온 사람들은 월미도나 만석동 같은 해안가에 움막 짓고 살면서 막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어. 만석동을 예전엔 ‘똥마당’이라고 불렀어. 피란민이 너무 많아 공중변소의 똥물이 넘친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아. 송현동에도 피란민이 많이 살았지.”

옆에 있던 도영수(78)씨도 거들었다.

“6·25 전에 내려온 사람과 전쟁 때 내려온 사람은 형편이 달랐어. 전쟁 전에 내려온 사람들 중엔 지식층이 많아 일찍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지만, 전쟁 때 내려온 사람들은 고생 많이 했지. 집 지을 판자가 없어 땅굴에 사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나도 그때 창현국민학교에서 배식 타다 먹으며 겨우겨우 연명했던 기억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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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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