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호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그가 도전한 최후의 실험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6-09-14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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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이종만에 대한 인물기사가 실린 1937년 당시의 잡지.

    1919년 7월,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6월 중순부터 지루하게 이어지던 장맛비는 7월에 접어들자 쉬지 않고 퍼부었다. 삼림이 우거진 금강산에도 물난리가 났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목재상 이종만은 구멍 뚫린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틀린 것인가.”

    1905년 약관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15년이 흘렀다. 한 해에 한 번꼴로 어김없이 맛본 실패였지만, 이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지난해 강원도 양구의 중석 광산에서 실패하고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해 옮겨온 곳이 금강산 유점사 아랫마을이었다.

    시세 변동도 크고 어디에 얼마나 묻혔는지 알 수 없는 광물을 찾아다니는 광업은 본질적으로 투기사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실패에 지친 이종만은 안정적인 사업을 하고 싶어 금강산에 들어와 목재상을 차렸다. 금강산 일대에서 무진장으로 나오는 값싼 원목을 사서 철로 침목이나 광산 갱목으로 가공해 팔면 세 곱절은 족히 남았다. 일확천금을 바랄 만한 사업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재기의 발판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던가. 이번엔 천재지변이 멀쩡한 사업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하구로 옮기기 위해 개천 옆에 쌓아둔 목재가 수마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차라리 화마(火魔)라도 맞았더라면, 숯이라도 건졌을 것을….”

    이제는 정말로 빈털터리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바다로, 산으로, 들로 악착같이 떠돈 15년 세월이 이종만에게 남긴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과 이마에 깊게 팬 주름, 손바닥에 단단하게 박인 굳은살이 전부였다. 이종만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운명을 저주하고, 심지어 고단한 인생을 끝내버리려 모진 마음도 먹어보았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대로 죽어버리기에는 가슴속에 품은 꿈과 피끓는 청춘이 너무나 아까웠다.

    “어떡하긴 어떡해. 다시 시작해야지.”

    이종만은 지난 15년간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 살길을 찾아 나섰다. 한여름 찜통더위 속에서 수마가 할퀴고 간 금강산을 터벅터벅 내려가는 이종만에게는 다행히도 한 가지 밑천이 남아 있었다. 나빠지려 해도 더는 나빠질 것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작인에게 토지를!

    1937년 5월12일, 경성 남산정(남산동) 천진루여관에서 대동광업(大同鑛業)주식회사의 창립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천진루여관으로 향하는 기자들은 자본금 300만원(현재 가치로는 대략 3000억원), 광구 면적만 4억평에 달하는 거대 금광회사의 창립 기자회견이 조선호텔이나 철도호텔 같은 특급호텔이 아니라 허름한 일본식 여관에서 열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더욱이 새로 출범하는 대동광업의 대표취체역(대표이사)은 바로 전날 영평금광을 동조선(東朝鮮)광업주식회사에 155만원을 받고 매각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금광왕 이종만이었다. 그러한 금광 졸부가 자신들을 허름한 여관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게 기자들의 은근한 생각이었다.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황금광시대’로 불린 1930년대 조선의 사금 채취선.

    예정된 시각이 되자 50대 초반의 중년신사가 나타나 회견장 중앙에 앉았다. 얼굴에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거만하고 우악스러운 금광 졸부 느낌은 나지 않았다. 겉모습만 보자면 한평생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지식인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회견장이 정돈되자 1937년 조선 광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종만 사장이 입을 열었다.

    “누추한 곳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 저는 경성에 집이 없어 경성에 올 때마다 이곳에서 묵고 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시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어제 영평금광을 155만원을 받고 동조선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습니다. 제가 바쁘신 여러분을 이곳까지 오시게 한 것은 매각대금 중 50만원(현재가치 500억원)을 출연해 신설할 ‘재단법인 대동(大同)농촌사’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중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기자회견장에 모인 기자들 중 누구도 그런 엄청난 계획이 발표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그때까지 조선 재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종만이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얼굴이나 보고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기자회견장에 온 참이었다. 기껏해야 돈 자랑이나 하다 끝나려니 예상했는데, 금광을 매도해 번 돈의 3분의 1을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작농을 위해 내놓겠다는 ‘폭탄선언’이 나온 것이다.

    “첫째, 재단법인 대동농촌사는 50만원의 자금으로 전 조선에서 중앙과 동서남북 다섯 지역에 적당한 장소를 선택하여 집단농지를 매입할 것입니다. 둘째, 재단이 소유한 집단농지는 경작자를 선발해 골고루 분배한 후 영구히 경작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셋째, 재단은 경작자로부터 매년 수확량의 3할을 ‘의무금(義務金)’으로 징수하여 집단농지를 추가로 매입하는 데 쓸 것입니다. 의무금은 30년 한도 내에서 징수하고 그 후로는 경작자가 자신의 수확물을 모두 가지게 할 것입니다. 단, 경작지의 소유명의는 영구히 재단이 보유하여 경작자가 토지를 팔거나 담보로 잡혀 어렵게 확보한 토지를 잃지 않도록 방지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작농의 생활안정을 영구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넷째, 집단농지 안에 부락민의 자치조직을 결성하여 교육, 위생, 문화 등 제반 문제를 경작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다섯째, 집단농지 안에 농업교육시설을 설치해 대동농촌의 중추가 될 청년을 양성할 것입니다.” (‘산금계의 대왕 이종만씨’, ‘광업시대’ 1937년 7월호)


    당시 소작료는 법적으로 50% 이상을 징수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60~70%씩 징수하는 악덕 지주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작료를 30%만 받겠으며 30년이 지나면 아예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이종만의 선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것도 지주의 당연한 권리로 ‘소작료’를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농지를 전 조선으로 확대하기 위한 기부금조로 한시적으로 ‘의무금’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이종만의 자영농 육성계획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하루이틀 생각해 즉흥적으로 발표한 선심성 발언이 아님이 분명했다. 농촌운동가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는 더더욱 아닌 ‘금광왕’ 이종만이 그처럼 거금을 조건 없이 사회에 내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평생 바다로, 산으로, 들로 돈을 좇아 떠돌았던 이종만은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처럼 웅대한 계획을 발표한 것일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이종만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전 조선 인구의 8할이 농사에 종사하는 만큼 농촌의 생활수준은 곧 조선인의 생활수준을 의미합니다. 농민의 빈궁은 우리가 가장 역점을 두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20여 년 동안 광업에 종사하다가 이제 어느 정도 금전을 만지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선 농촌의 갱생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자고 이런 계획을 한 것입니다. 처음 광산을 시작할 때도 돈을 잡으면 꼭 농촌사업을 해보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50만원 재단으로 농촌구제사업’, ‘조선일보’ 1937년 5월13자)


    험한 일을 하다가 뒤늦게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 중 일부는 더러 자신에게 부족한 명예를 보충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자선을 베풀기도 한다. 공익재단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놓고 실제로는 절세(節稅)나 상속의 도구로 삼는 부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종만은 달랐다. 재단에 출연한 금액도 금액이려니와, 자영농 육성사업에 임하는 태도에서도 진실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이종만은 자영농 육성계획을 발표한 지 넉 달 후, 자기 개인명의의 토지에서도 대동농촌사에 준해서 소작료를 징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봄 이상(理想) 농촌을 건설할 목적으로 50만원의 거금을 던져서 재단법인 대동농촌사를 창립한 이종만씨의 농촌사업에 대한 공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또 대동농촌사의 토지경작자에게는 수확량의 3할만을 농촌건설 의무금으로 징수한다는 계획은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종만씨는 9월14일 대동농촌사 이사회 석상에서 자기 개인의 소유 토지 157만평에 대해서도 금년부터 소작료를 3할씩만 징수하겠다고 선언하는 동시에, 그 뜻을 소작인에게 통지했다. 이에 대하여 이종만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작료를 3할 받는 것은 경영상으로 보아서도 지주에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조선농촌에서 소작료를 5할 이상 징수하는 지주가 있는지도 모르나 대부분은 5할을 기준으로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에 비교할 때 나는 소작료를 2할쯤 내린 것입니다. 이만한 것쯤으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원만히 진행된다면 얼마나 조선농촌을 위하여 기뻐할 일입니까?

    조선인은 물질 방면에 있어서는 남과 같은 생활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정신으로야 서로 돕고 살아가지 못할 것 있습니까? 나는 30년 동안 3할씩의 소작료를 징수하다가 30년 후에는 토지를 소작인에게 전부 물려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의 이번 이 행동이 조선농촌을 명랑하게 만드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둘도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작인 7 지주 3, 농촌사업가 이종만 씨가 소유토지에 실천’, ‘동아일보’ 1937년 9월16일자)


    사회주의 서적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노자(勞資)관계 모델’이 노동자의 입이 아니라 자본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더욱이 이종만은 그처럼 대단한 일을 하고도 생색을 내기는커녕 경영상으로 보아도 손해날 일이 아니라고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동아일보는 1937년 9월17일자 사설에서 “이런 갸륵한 독지가의 토지가 불행히 157만평에 ‘불과’하여 그 수혜 소작인이 겨우 연천, 평강, 영흥 3군의 153호에 그치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라고 극찬했다. 사회로부터 ‘부자가 더 큰 부를 소유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칭찬을 들은 것은 조선역사를 통틀어 아마도 이종만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종만의 일련의 자선행위는 ‘공부(公富·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부호)’라는 신조어를 등장시킬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1937년, 쉰세 살의 나이에 조선 재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종만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다가 그제야 나타났던 것일까.

    억세게 운 나쁜 사내

    이종만은 1885년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에서 7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열여섯에 뜻하지 않은 병마를 만나 3년을 병석에서 보내고 학업까지 중단했다. 원래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무엇이나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던 그는, 열아홉에 다시 학업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후 또다시 병이 도져 학업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병과 씨름하며 유년시절을 보낸 이종만은 20대에 접어든 1905년, 조선의 현실에 눈뜨고 고향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훗날 이종만은 자신의 20대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저의 20대는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문화, 산업, 인지(認知)가 모두 너무나 엄청날 만큼 뒤떨어진 암암한 쇄국시대였습니다. 더구나 제 고향은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라는 조그마한 반농반어의 포구였으므로, 고향 사람들은 모두가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밭이나 갈고 고기나 잡아먹으며 이렇다는 희망도 없이 대대손손이 살아오는 마을이었습니다.

    고향 부근에 병사(兵使·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있었는데, 그들의 전횡이란 실로 언어도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들은 그저 양반이면 인간 이상의 지엄한 존재라고 여기고 억울한 삶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병사의 무례한 행동과 언사를 매일같이 보고 듣자니,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이나 찾던 제 안에서 차츰 ‘어떻게 하면 고향 사람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분노와 이상이 싹트고 용솟음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에 가자, 거기에 가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동경이 싹트기 시작하여, 홀로 몇 달을 두고 궁리하다가 가산 일부를 팔아 여비를 겨우 장만하여 가지고 목선을 타고 상경한 것이 스무 살 되던 겨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도 철없는 용기였습니다. 그리던 서울을 처음 와본 시골 글방꾼의 심장은 단번에 황홀 감격하여 며칠 동안은 그저 구경만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여 가끔 혼자 웃는 때가 있습니다. (‘나의 20세 청년시대’, ‘동아일보’ 1940년 4월3일자)


    잠깐 동안 서울 공기를 마시고 고향에 돌아온 이종만은 큰 인물이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얼마 안 되는 논밭을 팔아 부산에 나가 어물상을 차렸다. 러일전쟁이 한창이어서 경기는 좋은 편이었다. 특히 마른 미역이 잘 팔렸다. 일본 상인들은 품질을 따지지 않고 미역이란 미역은 보이는 대로 거둬갔다. 장사가 잘 된다고 좋아만 하던 이종만에게도 의구심이 생겼다.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이공계 인력 양성을 위해 대동공전을 설립한 이종만의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1938년 1월4일자.

    “젠장, 일본 사람들은 미역만 먹고 사나….”

    내막을 알아보니 일본 상인들은 먹으려고 미역을 사가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상인들은 헐값으로 거둬들인 미역을 제약회사에 비싼 가격으로 되팔고 있었다. 미역은 당시 지혈제로 각광받던 ‘옥도정기’(沃度丁幾·요오드팅크)의 원료였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부상병이 속출하자 옥도정기의 수요가 격증했고 덩달아 일본에서 미역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조선 상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원래 받던 가격에 미역을 팔아치우며 장사가 잘 된다고 좋아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1905년 봄, 스물한 살 이종만은 가진 돈을 다 털어 미역을 매집했다. 이종만이 미역을 매집하는 동안 미역이 옥도정기의 원료로 사용된다는 사실이 조선 상인들에게도 알려졌고, 미역 가격은 두 배 이상 올랐다. 이종만은 창고 가득 미역을 쌓아두고 큰돈을 벌면 어디에 쓸까 하는 행복한 상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5월말 동해에서 일본 함대와 러시아 함대 사이에 큰 해전이 벌어졌고, 전투는 싱겁게도 하루 만에 일본 함대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미역이 있다는 소문만 흘려도 벌떼처럼 달려들던 일본 상인은 동해해전 이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몇 년은 끌 것으로 예상했던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난 탓에 미역 가격은 하루가 멀다 하고 폭락했다. 이종만은 매집한 값의 3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미역을 넘기고 어물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미역 장사로 빚더미에 오른 이종만은 고깃배를 탔다. 2년 남짓 남의 배에서 품을 팔다보니 어느 정도 빚도 청산되었고 고기 잡는 요령도 생겼다. 1907년, 스물세 살이 된 이종만은 어선을 빌려 대부망(大敷網·큰들그물) 어업에 나섰다. 그러나 어업은 생각만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원산까지 가서 명태를 가득 싣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던 배가 울산 앞바다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전복된 것이었다. 아까운 생선을 수장시킨 것은 물론 선주에게 배 값도 물어주어야 했다. 끔찍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좌절한 이종만은 1908년 스물네 살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향리로 돌아온 이종만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가는 고향을 위해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스물여덟 살이 되던 1912년 향리에 흩어져 있는 서당을 통합해 대흥학교를 설립했다.

    신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였지만, 고향후배들을 위해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쳐 교편을 잡았다. 밤을 새우고 공부해가며 신학문과 신문화를 소개했다. 그러나 단발(斷髮)을 장려하고 풍속 개량에 진력하다가 그만 봉건적 인습에 빠져 있는 동네 노인들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동네 노인들이 반발하니 학생들도 동요했다. 등교하는 학생이 점차 줄어들더니 1년이 안 돼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이종만은 또 한 번 쓴잔을 들이켰다.

    이종만이 대흥학교 간판을 내릴 무렵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비록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조선 사회도 큰 영향을 입었다. 일본이 연합국에 참여해 군수물자를 공급하게 되자 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광물인 중석 값이 폭등한 것이다.

    뜻을 품은 지 10년이 지나 어느새 서른 살이 되도록 실패만 거듭하던 이종만은 이재민 구호를 위해 강원도에 들렀다가 중석광 이야기를 들었다. 이종만은 대흥학교의 실패를 통해 시골에서 조그마한 학교를 하나 경영하려 해도 엄청난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뜻을 펼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남의 돈 끌어 쓰지 않고 스스로 재력을 갖추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28전 29기

    이재민 구호를 끝낸 이종만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강원도 양구로 가서 중석광을 시작했다. 인부를 거느리고 손바닥이 갈라지도록 망치질을 해댄 결과 2년 만에 5만원(현재 가치 50억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버티면 사회를 위해 큰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대동콘체른의 계통도. ‘광업조선’ 1937년 6월호에 실린 도표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늘은 이종만의 편이 아니었다. 1918년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석 값은 다시 폭락했다. 파내는 족족 비싼 값으로 팔리던 중석은 한순간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광업설비를 갖춘다고 끌어쓴 빚을 갚느라 악착같이 모은 돈 5만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비싸게 구입한 장비를 고철 값으로 넘기고 양구를 떠나 금강산 유점사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그는 목재상을 하며 착실히 재기의 발판을 다지려 했는데, 그만 수마가 전 재산을 앗아가버린 것이었다.

    그러던 1923년, 이종만보다 다섯 살 어린 최창학이 금점판을 떠돈 지 10여 년 만에 평북 구성군 조악동에서 노다지 금광을 발견했다. 연이은 실패에 실망해 낙향해 있던 이종만은 무작정 상경했다. 마흔을 코앞에 둔 그로서는 돈을 벌어 사회사업을 하자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계획을 바꿔 곧장 사회사업에 뛰어든 그는 이준열, 허연, 연학년 등 경성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려 경성고학당을 설립했다.

    가난하고 굶주린 고학생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데 열과 성을 다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경영난에 시달려 5년 만에 고학당 문을 닫아야 했다.

    그 사이, 나라의 북쪽 끝에서는 또 한 명의 금광왕이 탄생했다. 1923년 평북 정주에서 시골유지 생활을 하고 있던 마흔한 살 방응모가 금광을 찾아 나선 지 3년 만에 평북 삭주군 다릿골(橋洞)에서 삼지금맥(손가락 세 마디짜리 노다지 금맥)을 발견했다. 1884년생으로 이종만보다 한 살 연상이던 방응모는 1931년 교동금광을 매도한 돈 100만원(현재 가치 1000억 원)을 들여 경영난에 허덕이던 조선일보를 인수한다.

    1927년, 불혹을 훌쩍 넘긴 이종만은 방응모의 성공신화를 위안 삼아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함남 정평군 영평평야 개척사업, 함남 북청의 개간사업이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실패가 스무 번을 넘기다 보니 슬프거나 괴롭지도 않았다.

    그 후 이종만은 다시 방향을 돌려 함경남도 영흥군 진평면에서 동창광산을 경영하다가 또 실패하고, 다시 1928년에는 함경남도 신흥군 명태동에서 3년간 광산을 경영하며 이상농촌 건설을 꿈꾸다가 역시 실패했다. 실로 이종만은 칠전팔기의 불사조 같은 인물이었다. 1931년 12월27일, 마흔일곱 살을 코앞에 둔 이종만은 주머니에 겨우 27전을 가지고 백설이 성성한 길을 걸어 또다시 신흥군에서 광업개발회사와 기린광산을 차렸다. (‘이종만씨의 인물’, ‘조광’ 1937년 7월호)


    광업개발회사와 기린광산은 큰 수입을 안겨주지는 않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을 만큼의 소득은 안겨주었다. 때마침 조선 전역에 금광 바람이 불어 금이 많이 나오든 적게 나오든 금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기린광산을 발판 삼아 양질의 금광을 찾아다니던 이종만은 1932년 일본인 기다시마가 출원한 영평금광의 출원증을 매입했다. 그가 벌인 스물아홉 번째 사업이었다.

    영평금광은 대한제국 시대부터 잘 알려진 사금광산이지만, 한동안 폐광으로 방치된 상태였다. 이종만은 유명한 사금 산지라면 부근에 틀림없이 석금(石金·돌에 박혀 있는 금)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본인 기다시마로부터 450원(현재 가치 45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출원증을 매입했다. 소규모로 금을 채취하다가 1934년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서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섰다. 착암기 10대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채굴하자 노다지 금맥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1936년 한 해 동안에만 40여만원(현재 가치 400억원) 상당의 금이 생산되었다.

    이종만은 금광에서 나온 수익을 개인적인 용도로 소비하지 않고, 광산설비를 갖추거나 유망한 금광을 매입하는 데 재투자했다. 그 결과 1936년에는 장진광산이라는 조선 최고의 금광 개발권을 확보했다.

    원래 장진광산은 60~70년 전 이용익이 다년간 경영한 국영광산이었다. 그런 것을 현재 이종만이 개발권리를 얻게 되었는데, 그가 소유한 장진광산 일대의 등록광구만 해도 9개 광구이며, 출원광구는 400여 개에 달한다. 그 면적이 무려 4억평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 광산이다. 이용익이 경영할 당시는 기술 수준이 저열해 얼마간 사금을 채취했을 뿐 그 진가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던 광산을 현재 이종만이 경영을 하게 되자 그의 적극적 투자와 특수한 경영방법에 의하여 단시일간에 비약적 성과를 나타내어 전 조선 금광계에 놀랄 만한 이채를 발했다. 장진광산은 개발 기간은 짧으나 예상 이상의 부광인 것이 이미 판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함금품위(含金品位·원석에 금이 포함된 비율) 또한 조선 제일이라 할 수 있다. (‘산금계의 대왕 이종만 씨’, ‘광업시대’ 1937년 7월호)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이종만이 묻혀 있는 평양의 애국열사릉. 그는 이 묘지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출신 인사다.

    쉰셋, 금광왕에 등극하다

    장진광산의 개발에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자 이종만은 그에게 첫 번째 성공을 안겨주었던 영평금광을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조선광업주식회사에 155만원을 받고 매각했다. 이로써 무명의 광주(鑛主) 이종만은 조선 제일의 금광왕에 등극했다. ‘조선의 황금귀(黃金鬼)’라 불리던 최창학이 금광계의 제왕에 등극한 지 15년 만의 일이었고,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금광왕에 등극한 이종만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30년 실패 끝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930년대 금광 하나 잘 만나 하루아침에 백만장자 반열에 올라선 사람은 한 해에 10여 명씩 어김없이 나왔다. 세상 사람들이 진정으로 감탄한 것은 그의 ‘화끈한’ 씀씀이였다. 그 어떤 졸부도 이종만만큼 돈을 아름답게 쓰지 못했다.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팔아가지고 그중에서 50만원의 거액을 조선 농촌 구제 사업에 던진 이종만씨는, 금상첨화로 12만원의 큰돈을 그 금광 광부, 직원 등의 위로금으로 또는 학교의 기부금, 부근 빈민의 구제금 등으로 한꺼번에 던졌다. 물가가 치솟아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물결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이때 단연 명랑하고 유쾌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9월14일 이종만씨는 이번에 팔린 함남 정평군 문산면 영평금광에 도착하여 매수측인 동조선광산주식회사에 완전히 광산사무를 인계한 다음, 오전 9시부터 영평금광 석별과 순직자 위령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식이 끝난 후 이종만씨는 영평금광 직원과 광부 1000여 명에게 빠짐없이 위로금으로 10만원을 나눠주고, 영평금광이 위치한 본동과 부근 마을의 빈민구제금으로 1만원을 던져주고, 광부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영평학원에 2000원을 기부하고, 왕장공립보통학교에도 1000원을 기부하였으며, 그 광산에서 순직한 광부 4명의 유족에게도 각각 금일봉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 2시 차편으로 왕장역을 떠나자 역전에는 감사와 기쁨에 뛰는 1000여 명 광부들과 그 가족이며 부근주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그의 덕행을 찬양하여 마지 않았다.

    천진루여관까지 찾아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종만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돈 번 것은 어디 나 혼자서 번 것입니까. 광부와 직원들과 함께 그들의 피와 땀을 합쳐서 얻은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들에게 돈을 나눠준 것은 내가 할 의무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가 여러분의 덕택으로 여기고 미력이나마 전력을 다하여 사회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이종만씨 재차 쾌거’, ‘조선일보’ 1937년 5월16일자)


    155만원에 영평금광을 매각한 뒤 이종만이 대동농촌사를 포함해 사회에 환원한 돈은 통틀어 80만원에 달했다. 매각대금의 절반을 사회에 던지고도 ‘내가 할 의무를 한 것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가족들 생활은 1만~2만원이면 족하니 나머지 재산은 죽기 전에 꼭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그는 잊지 않았다.

    비운의 대동콘체른

    1937년 5월 재단법인 대동농촌사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 9월에는 개인 소유의 토지에서 소작료를 3할만 받겠다고 해서 또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이종만은, 10월에 들어서자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 위기에 내몰린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120만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해 또 한 번 세상을 감동시켰다.

    총독부의 방해로 숭실전문학교는 끝내 폐교되고 말았지만, 대신 이종만은 평양에 이공계 전문인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이종만이 대동공전 신설 계획을 발표하자 학교를 잃을 위기에 몰렸던 숭실전문 동창회와 교수회, 학생회에서는 감사 전보를 보냄은 물론 경성에 대표단을 파견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종만은 1938년 학생 80명, 광산과 한 개 학과로 출범한 대동공전을 세계적인 이공계 대학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120만원으로 학교 시설 갖추기가 어려워지자 이종만은 30만원의 사재(私財)를 추가로 출연했다. 대동공전은 1944년 폐교될 때까지 5회에 걸쳐 332명의 조선인 졸업생을 배출했다. 총 29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한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조선인 졸업자가 통틀어 421명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1938년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대동공업전문학교 등 ‘대동콘체른’이라 불린 총 5개 거대 사업체의 수장이 되었다. 대동광업주식회사에서 나오는 수익을 바탕으로 영세 광산 지원, 자영농 육성, 신문화 보급, 과학기술 전문가 양성 등 20대에 사업을 처음 시작하며 가슴속에 품었던 꿈을 차례로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일하는 사람은 다 같이 잘살자.”

    이종만은 이 단순한 경영철학으로 사업체의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고, 추가이익을 노동자들에게 배분하여 자신이 사심 없는 경영자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이종만에게나 조선에나 축복이었던 ‘대동콘체른’ 역시 이전 28번의 사업이 그랬던 것처럼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다섯 개의 거대 사업체 중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은 대동광업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 나머지 사업체에서 천문학적인 숫자로 발생하는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1940년 대동광업의 부채는 500만원에 달했고, 대동공전은 교사 신축자금이 부족해 사채까지 끌어 썼다. 경영실적이 극도로 악화된 가운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동콘체른’은 차례로 붕괴했다. 1942년 부채액이 800만원까지 늘어나 이미 파산상태였던 대동광업은 1943년 총독부의 금광 강제정리사업 과정에서 해체되었고, 같은 해 대동출판사는 대동공전 경비마련을 위해 매각되었다. 1944년 대동공전은 평남도청이 인수하여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평양공업전문학교로 간판을 바꿔 단 대동공전은 광복 후 평양공업대학, 김일성대학 공학부를 거쳐 김책공업대학으로 이어졌다.

    광복 후 이종만은 적산(敵産)기업인 삼척탄광을 불하받아 30번째 사업을 시작했다.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1948년 분단이 되자 이종만은 고심 끝에 자진 월북했다.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 민주주의 결성대회’에서 김일성은 자진 월북한 유일무이한 자본가 이종만을 ‘애국적 기업가’라고 치하했다. 이종만은 제1,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광업부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아흔셋을 일기로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애국열사릉에 묻힌 자본가

    북한의 피폐한 경제현실을 고려하면 이종만의 31번째 사업인 ‘북조선 광업 건설’ 또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종만은 이 세상에서 93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사업에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이종만의 실패는 아름답고 숭고했다. 그는 28번 쓰러지고 29번 일어나면서도 기필코 사업에 성공해 소작인에게 토지를, 광부에게 광산을 돌려주려 했고, 일하는 사람이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구현하려 했다.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등


    이종만은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좇은 것이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 돈은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종만은 자본가 신분에도 ‘노동자의 나라’를 표방한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꿈을 일찌감치 포기했다면, 이종만은 서른한 번의 실패를 경험하지 않아도 됐을는지 모른다.

    1980년대 한국의 대학에는 이상사회를 꿈꾸던 수많은 청년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이상을 품고 부조리한 현실에 뛰어들었다. 언젠가 성공하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것이라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게 현실에 뛰어든 청년들 중 더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큰 성공도 거뒀다. 그러나 그들이 온 세상을 감동시킬 만큼 엄청난 계획을 발표했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이종만의 실패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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