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호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시드니에서 털어놓은 ‘여인 선언’

“스무 살, 이젠 사랑도 하고 아파도 할 거예요”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lipsyd@hanmail.net

    입력2006-09-25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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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시드니에서 털어놓은 ‘여인 선언’
    11월 개봉 예정인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 촬영이 끝난 바로 다음날(8월20일) 호주 시드니로 날아온 배우 문근영이 ‘스무 살 선언’을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영화제목과는 반대로 ‘스무 살, 이젠 사랑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만년 소녀 같은 그가 ‘소녀에서 여인으로’의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문근영만큼이나 아름다운 도시, 시드니에서 말이다.

    물론 이런 대화를 나눈 상대가 10대 한인동포들이니 가볍게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시드니의 린필드 한국학교에서 일일교사로 진지하게 수업을 하면서 한 얘기라 은근하게 내비친 속내일 수도 있다.

    그의 선언은 수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나왔다. 분위기가 퍽 차분해진 상황에서 린필드 한국학교 7학년(중1) 남학생이 “누나, 저 어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문근영은 “너 몇 살이니? 내가 이래봬도 스무 살이란다”라고 했다. 문근영은 1987년생이다. 자연스럽게 “스무 살이 됐으니 뭘 하고 싶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무엇보다 운전면허증을 따서 여행을 하고 싶다”더니 “이제 스무 살이 됐으니까 사랑도 하고 싶은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문근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어느 고등학생 팬이 ‘누나, 이대로만 커주세요’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면서 “그러나 문근영도 사람이다. 지금부터는 사랑도 하면서 아파할 거다. 한 인간으로 성숙하고 싶다”는 말로 ‘사랑 발언’을 마무리했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시드니에서 털어놓은 ‘여인 선언’

    시드니 린필드 한국학교에서 일일교사를 한 후 학생들과 함께한 문근영.

    하지만 학생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었다. “그동안 사랑한 남자는 없었냐”는 질문이 이어졌고 문근영은 “짝사랑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랑을 표현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영화배우라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어떤 남자가 이상형인가?”라는 질문도 나왔지만 문근영의 응수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내 이상형은 이영표 선수다. 초롱초롱한 눈매와 재치 넘치는 플레이가 내 맘에 쏙 든다. 그분의 따뜻해 보이는 웃음 등 좋은 게 너무 많은데, 아쉽게도 결혼을 한 분이라서 포기했다”면서 깔깔 웃었다.

    그러나 문근영은 사랑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나마 안다고 했다. 연애한 경험은 없지만 연기하면서 사랑의 간접체험은 충분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그의 출세작인 TV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어린 은서 역을 맡아 정말로 동화 같은 사랑에 눈을 떴고, 영화 ‘어린 신부’와 ‘댄서의 순정’에서는 결혼까지 했다.

    한인학교 일일교사 체험

    문근영이 호주를 방문한 것은 ‘스무 살의 사랑’ 때문은 아니다. 호주에 유학 중인 하나뿐인 동생 지영을 만나기 위해 영화촬영이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때마침 학교(성균관 대 인문학부) 1학년 1학기 수업도 끝나 오래전부터 벼르던 시드니행 비행기를 탄 것.

    시드니에는 문근영의 막내 외삼촌인 류식(42)씨와 이종사촌 동생들도 살고 있다. 당초 계획에 없던 ‘한글홍보대사’와 린필드 한국학교 일일교사를 맡은 것도 어린 이종사촌 동생들이 그곳에서 한국말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9년 전 호주에 온 류식씨는 호주에서 세 자녀를 낳았다. 세 아이가 지난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이종사촌 언니인 문근영을 만났는데, 정작 놀란 건 문근영이었다. 호주에서 나고 자란 이종사촌 동생들이 우리말을 유창하게 했기 때문이다. 외삼촌한테서 “얘들이 시드니에 있는 한국학교에 다니면서 한국말과 한글을 배운다”는 말을 들은 문근영은 호주를 방문하면 학교측에 감사의 뜻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문근영과 린필드 한국학교의 인연이 맺어졌고 8월20일 시드니를 방문하자마자 그 학교부터 찾았다. 그런데 학교 사정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다. 타라무라 고등학교 교실을 토요일에만 빌려 사용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학업과 영화촬영으로 지친 심신을 쉬려고 했던 문근영은 생각을 바꿨다. 한국학교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국학교 돕기 자선모금 사인회’와 일일교사를 자청하고 나선 것. 사인회는 짧은 홍보 기간에도 불구하고 성황을 이뤘다.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인과 중국인 팬들도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서 길게 늘어선 대열에 끼어들었다.

    사인회를 마친 문근영은 8월26일 린필드 한국학교의 일일교사가 되어 유치반, 중등부, 고등부 수업을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6시간 동안 진행했다. 동화 구연, 노래, 연기, 자유토론 등 다양한 방식의 수업을 했다.

    수업을 마친 뒤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700권의 한국도서 증정식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삼촌 류식씨가 근무하는 대한관광여행사(대표 김병일)에서 주관한 ‘문근영 사인회’ 수익금 전액을 학교 발전기금으로 전달했다. 린필드 한국학교측에서는 문근영에게 호주를 방문하면 언제라도 수업을 할 수 있는 명예교사 증서를 수여했다.

    린필드 한국학교 신기현 교장(NSW대 교수)은 “문근영씨의 방문은 외국의 어려운 환경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됐다”면서 감사를 표했다. 그는 “문씨가 기탁한 학교발전기금은 교지 발간자금으로 조성해 한인 교민자녀들이 좀더 흥미롭게 한글을 배울 수 있는 자료를 만들겠다”고 했다. 또한 기증받은 도서에 대해서도 “시드니총영사관의 한국교육원에 기증해 린필드 한국학교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시드니총영사관의 박인순 교육원장에게 도서를 전달했다.

    영화에 영혼의 닻을 내리다

    호주에는 할리우드에 진출해 성공한 배우가 많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배우만 10명 가까이 될 정도다. 멜 깁슨, 러셀 크로, 제프리 러시, 니콜 키드먼, 주디 데이비스, 케이트 브란체, 나오미 왓츠 등은 모두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호주 출신의 배우들이다. TV 미니시리즈 ‘가시나무새’의 여주인공 메기 역을 맡았던 레이첼 워드도 호주 출신이다. 그는 호주에 사는 게 좋아서 할리우드 진출을 포기한 국민배우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레이첼 워드는 자선기관 ‘월드비전’의 주요멤버로 30년 이상 꾸준하게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호주의 유명 인사들은 그가 주관하는 자선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니콜 키드먼이 “레이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호주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신망이 두터운 배우다.

    문근영은 수업 중에 대학생활에 대해 얘기하면서 “2학년에 올라갈 때 전공을 정하는데, 성적만 된다면 국문학과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국문과에 가려는 것은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시조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3줄짜리의 짧은 시조에 아주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고, 시조를 읽고 외우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는 것.

    그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자선의 천사’로 소문난 문근영이 국문학을 공부해 시인이 되면 레이첼 워드와 똑같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쓰면서 자선활동을 열심히 하는 국민배우 말이다. 그에게 “시인이 되고 싶지 않으냐?”고 묻자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시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제겐 연기가 더 중요해요. 아무리 좋은 것이 있을지라도 연기생활에 방해가 되면 가차없이 내칠 겁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애정과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연기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면서 “더 좋은 연기를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다양한 체험을 통한 내공쌓기에 내 열정을 다 바칠 것”이라는 말을 확신에 찬 어조로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는 “‘배우’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배우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며 “배움이야말로 모든 배우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했다. 연기를 위해서 그 어떤 것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고 더 좋은 연기를 위해서 끊임없이 배우겠다고 다짐하는 그를 보면서 ‘영화에 영혼의 닻을 내린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향기 지닌 ‘똑순이’

    누군가가 문근영을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배우”라고 말했다. 그건 단지 외모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특유의 청순미와 내면에서 풍겨나오는 ‘사람의 향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호주 여행에 동행한 외할머니 신애덕 여사를 만나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문근영이 “저의 매니저이십니다”라고 소개한 70세가 넘어 보이는 할머니와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 문근영은 수업시간에도 외할머니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칭찬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면 그건 100% 외할머니 덕택”이라고 말한 문근영은 “부모님 두 분 다 공무원이셔서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지금도 함께 살면서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내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고 했다.

    12세의 문근영은 TV드라마 ‘가을동화’로 최우수 신인상을 받으면서 “이 상을 저의 매니저이신 외할머니께 바친다”고 수상소감을 마무리할 정도로 외할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며 촬영장 청소도 마다하지 않는 외할머니이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반면에 신애덕 여사는 문근영의 타고난 착한 심성을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 신 여사는 “근영이가 꼬맹이일 때부터 작품이 끝나면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고 회상했다.

    하루 종일 문근영의 수업을 참관하고 인터뷰하면서 받은 인상은 영락없는 ‘똑순이’였다. 똑똑하다는 뜻과 똑 부러진다는 의미의 두 가지 ‘똑순이.’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어떤 여학생이 “언니는 어쩌면 그렇게 말을 잘하느냐?”고 묻자 문근영은 ‘똑순이’답게 답변했다.

    “말을 잘한다기보다 대체로 내 생각을 잘 정리해서 표현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자기 생각을 잘 담아내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책 읽기를 좋아해서 늘 책을 끼고 자랐어요. 소리 내서 읽기도 하고 동화나 소설은 마치 연기하듯이 낭송하다보면 발성연습도 되고 지식도 축적됩니다. 무엇보다 생각이 깊어져 의사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요.”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시드니에서 털어놓은 ‘여인 선언’

    문근영은 맑고 귀여운 이미지로 ‘국민 여동생’이란 애칭을 얻었다. 영화 ‘댄서의 순정’, 드라마 ‘명성황후’, 영화 ‘장화홍련’(위부터 시계 방향순).

    사실 똑똑한 사람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잘 풍겨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예외다. 어쩌면 ‘국민 여동생’이라는 문근영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별명 덕인지도 모른다. ‘국민 여동생’은 늘 착해야 하니, 늘 착한 심성으로 살면서 배우고 또 배운 덕분에 얻은 축복이리라.

    강의 한 번도 안 빠져

    새내기 대학생 문근영은 호주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시드니에 있는 뉴사우스웨일스 대학을 방문해서 한국학과 수업을 참관하고 학생들을 만났다. 여느 학생과 다를 바 없는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얼굴엔 화장기도 거의 없었다. 미국인 출신 글렌 이본 교수가 가르치는 한국어 과목을 공부하던 학생들은 그가 나타나자 박수와 환호로 맞았다. 학생들 중에는 일본, 홍콩, 대만 출신이 많았고 한국에서 입양된 이도 2명 있었다.

    이본 교수의 한국어 수업이 끝난 뒤 문근영과 학생들이 만나는 자리가 이어졌다. 학생들이 서툴지만 한국말로 질문하고 문근영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당초 30분 정도 할 예정이었으나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져 1시간을 훌쩍 넘겼다.

    학생들은 우선 자신들의 출신국가에 가봤는지 물었고, 영화배우 문근영과 대학생 문근영에 대해 반반씩 물었다. 문근영은 “배우 활동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촬영과 수업을 넘나드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재미있다”면서 “영화사의 배려로 수업이 없는 날에만 촬영을 해서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다”고 답해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문근영은 한국어가 서툰 학생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해주고 “내 말을 이해했느냐?”고 물은 뒤 부족하다는 반응을 보이면 수업을 참관한 신기현 교수(뉴사우스웨일스대 한국어 및 일본어과 학과장)의 도움을 받아 보충답변을 했다.

    수업이 끝난 뒤 문근영은 신 교수와 함께 학교를 둘러보면서 많은 질문을 했는데,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한국어를 배우는 비한국계 학생들이 한국문학에도 관심을 보이느냐”는 것이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은 그로서는 당연히 궁금한 대목이었다.

    신 교수는 “시기에 따라서 변화가 있지만, 처음엔 통역과 번역을 공부하는 학생이 많다가 비즈니스 쪽으로 옮겨가더니 다시 통역과 번역 쪽으로 돌아왔다”면서 “아쉽게도 한국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문근영은 “문학작품이 전반적으로 다 그렇지만 특히 한국문학에는 역사를 소재로 한 것이 많아서 역사를 배우다 보면 문학에도 관심을 보일 것”이라며 “한국문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시드니에서 털어놓은 ‘여인 선언’
    이렇듯 학업과 관련된 사안에 깊은 관심을 내비치는 문근영에게 “새내기로 대학공부에 적응하는 것도 벅찰 텐데 영화까지 찍었으니 정말 슈퍼우먼이다. 학교생활 중에서 제일 힘든 부분이 어떤 것이냐?” 물었더니 예상했던 대로 “주변의 시선”이라고 대답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지만, 그런 부담을 의식하면 할수록 더 부담이 됐다. 나중엔 의도적으로 무신경하려고 애썼더니 많이 나아졌다. 내가 이래 봬도 학교 수업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성적도 무난하게 나왔지만 2학기엔 정말 잘하고 싶다.”

    그가 대화 곳곳에서 내비친 학구열을 감지하고 “유학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물었더니 “그러고 싶다. 소속사 사장님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쯤일지는 나도 모른다”고 했다.

    ‘국민 여동생’의 무게

    정신분석학 용어 중에 ‘집단무의식’이 있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 개인무의식과 구별하기 위해서 만든 용어로 ‘태고로부터 내려온 인류의 경험이 그 개인에게 축적되어 만들어진 무의식’이 집단무의식이다.

    집단무의식을 이해하려면 태고 유형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모방(mimesis)을 하는 동물인데, 맨 처음에 모방을 한 모델(원형)을 태고 유형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문근영이 새처럼 날아가는 연기를 했다면, 그 연기의 태고 유형은 새의 날갯짓이다.

    태고 유형 중에서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페르소나(persona)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나왔다. 그 시절엔 연극할 때 배우들이 분장을 하는 게 아니라 가면을 쓰고서 맡은 역할을 연기했다. 예를 들면 천사 역이면 천사의 탈을 쓰고 악마 역이면 악마의 탈을 썼다. 이렇듯 페르소나는 ‘겉으로 보이는 나’를 뜻한다. 나의 ID와 신분 등이 대표적인 페르소나이고 연기자가 맡는 배역도 페르소나다. 문근영의 페르소나를 대충 열거해보면 이러하다.

    문근영은 문홍근씨의 장녀로 시작해서, 외할머니의 외손녀, 하나뿐인 동생의 언니, 대학생, 배우, 모델, 동네의 주민, 대한민국 국민, 인류의 한 구성원 등등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자연스러운 페르소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 여동생’이라는 인위적이고 상징적인 페르소나에 이르면 한층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져서 가끔씩 감당하기 힘들 때가 생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동이 자의적이고 자발적이기보다는 타인의 눈높이에 맞춘 가식적 행동이나 위선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직업이 교사나 목사다. 자기행동의 전부가 완전무결하게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나머지 본능과 타고난 정서를 억압해 교사나 목사라는 페르소나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 때문이다.

    모범생이라는 페르소나에 희생되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문근영의 닉네임 ‘국민 여동생’도 자칫 그 범주에 들 수가 있다. 본능적인 충동이나 욕망, 정서를 심하게 억압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근영이 대중 앞에서 ‘국민 여동생’으로 살아갈 때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 심각한 갈등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페르소나가 지나치게 팽창해 자기혐오에 빠질 수도 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본능에 따라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 먹고, 자고, 자녀를 출산하는 일은 인간생존의 바탕이 되는 본능적인 충동이다. 그러나 본능대로만 살다보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본능을 억압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렇게 억눌린 본능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숨어서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는 외면적인 자아가 성장하는 것에 비례해서 같이 성장한다. 외면적인 자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융은 그림자를 우리의 ‘어두운 형제’라고 불렀다.

    문근영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연기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크게 겪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가령 뭇사람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수학여행조차 갈 수 없는 처지가 됐을 때 심한 갈등을 느꼈다는 것이다. 대학생이 되고보니 고등학생 때가 그리워진다면서, 고교 시절에 하지 말라는 짓을 몰래 해보고 싶었지만 배우라서 꾹 참았다는 고백도 했다. 가끔은 위악적이고 싶은 충동을 문근영은 ‘국민 여동생’이라는 페르소나에 짓눌려 스스로 억압해온 것이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시드니에서 털어놓은 ‘여인 선언’
    린필드 한국학교 유치부·초등부 어린이들과 어울려 구연동화를 하고 올챙이 춤을 출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고등부 학생들에게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얘기할 때는 헛헛한 몸짓으로 묻어났다. 그럼에도 연기자 문근영의 희망이 그 쓸쓸한 몸짓에서 피어올랐다. ‘국민 여동생’이라는 페르소나에 억압당해온 문근영이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로서 억눌린 정서를 영화에서 폭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연기자는 천사의 탈도 쓰고 악마의 탈도 써야 하지 않겠는가.

    9월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호주국립영화·방송전문대학(AFTRS)에서 ‘화산고’ ‘장화홍련’ ‘공동경비구역JSA’ ‘무사’ 4편의 한국영화가 상영되고 한국영화 세미나가 열릴 예정이다.

    호주에서 상영되는 ‘장화홍련’

    이번 한국영화 세미나를 주재하는 AFTRS 영화연구학과의 벤 골드스미스 박사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호주영화와 마찬가지로 자국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변화를 거쳤고, 최근 몇 년 동안은 자국시장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제치고 있어 국제적으로도 큰 이목을 끌고 있다”면서 “이번 세미나를 통해 한국영화의 장점과 특징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연이지만 문근영이 호주를 방문한 직후에 열리는 한국영화 세미나에서 상영될 ‘장화홍련’은 그녀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영화라고 한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임수정이라는 좋은 선배를 사귈 수 있었고, 극중 인물인 배수연의 캐릭터 또한 그의 맘에 쏙 들었기 때문이란다.

    영화 ‘장화홍련’ 얘기가 나오자 영화를 본 어린 학생 하나가 “그 영화 찍을 때 무섭지 않았어요?”라고 물었다. 문근영이 한참 동안 깔깔 웃더니 “아니,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왜냐면 내가 찍을 때는 귀신도 안 나오고 핏자국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시사회에 가서 영화를 보는 동안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라고 했다.

    그는 또 “‘장화홍련’의 수연이 캐릭터에 흠뻑 빠져서 그 다음에 연기한 ‘어린 신부’의 보은이 역은 별로였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영화 간판을 빨리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라고 덧붙였다.

    ‘어린 신부’를 연출한 감독이 들으면 섭섭해할 얘기인데도 문근영은 거침없이 말했다. 그런 태도는 다른 얘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배우답지 않게(?) 입에 발린 얘기는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똑순이답게 똑 부러지는 대답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했다.

    연극영화과 안 간 까닭

    8월26일, 냉기가 뼛속까지 스민다는 시드니의 겨울이 한국에서 온 ‘국민 여동생’을 위해 잠시 물러간 듯 따뜻한 하루였다. 이날 일일교사로 나선 문근영은 유치부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많은 학생을 상대로 장장 6시간 동안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문근영의 수업시간에 나온 질문과 답변, 나중에 필자와 나눈 이야기들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질문은 앞에서 얘기한 대로 유치부 어린이에서 고등학생은 물론 한국학교 교사들과 수업을 참관한 학부모들한테서도 나왔다.

    ▼ 본인이 예쁘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예쁘다고 말해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나 자신은 별로라고 생각한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셨다. 내가 어려서 배우가 되게 해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니가?’라고 하셨다. 그래도 가끔은 스스로 예쁘다고 착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 어떤 동기로 배우가 됐나.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TV를 보니까 어떤 배우가 하루는 간호사로 나오고 그 다음에는 변호사로 나오는 걸 보고 배우가 되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때 학교무대에서 ‘백설공주’의 난쟁이 역을 맡으면서 연기에 매력을 느꼈다. 엄마를 졸라서 연기학원에 다녔다. 스무 번 정도 오디션을 보기도 했지만 대체로 운이 좋은 편이었다.”

    ▼ 어느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봤는가.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살인의 추억’이다. 한국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외국영화로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100번쯤 봤을 정도로 좋아한다.”

    ▼ 출연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는?

    “이번에 촬영을 끝낸 ‘사랑따윈 필요없어’이다. 상대역을 맡은 김주혁 아저씨는 정말 대단한 배우다. 그동안 ‘류민’이 되어 연기하면서 그 캐릭터에 쏙 빠져들어 행복하게 지냈다. 현실세계와 영화 속 인물을 혼동한다는 건 연기를 제대로 했다는 뜻도 된다.”

    ▼ 어떻게 해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내 경우는 배역에 심취했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허무하기조차 한데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 다시 말해서 촬영하는 동안은 배역의 캐릭터대로 살 수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촬영이 끝나면 그때부터 힘들어진다.”

    ▼ 본인이 출연한 영화는 누구와 함께 보나.

    “처음엔 혼자 봤다. 가족들에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게 쑥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외할머니랑 보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연기한 영화를 보는 일은 복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가장 매서운 눈으로 본다.”

    ▼ 왜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지 않았나.

    “좀 외람된 얘기지만 한국에 있는 연극영화과에서는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바닥부터 배우고 싶은데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사실은 나도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싶어서 몇 군데 노크해봤는데 나를 학생으로 취급하지 않고 연예인 문근영으로 대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바닥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언젠가는 연극영화과에 가서 공부할 생각이다.”

    ‘악플’ 통해 자기 성찰

    ▼ 어떨 때 가장 힘들고, 그럴 때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나.

    “캐릭터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힘들다. 또한 내 안에 너무 많은 내가 있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가 힘들다. 그럴 때는 나 혼자 묻고 대답한다. 가끔 매니저 오빠에게 털어놓기도 하지만 답은 나 스스로 찾는다. 또 하나, 나는 서점에 가면 거의 충동적으로 시집을 잔뜩 구입하는데, 시를 읽다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 누가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가.

    “나 자신이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다. 결국 마지막 결승점에서 만나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한다.”

    ▼ 연예인 중에서는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해서 선배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는 일이 없기 때문에 교제의 폭이 아주 좁다. ‘장화홍련’을 함께 한 임수정 언니와 호흡이 잘 맞고 친하게 지낸다. 함께 연기했던 분들 모두를 소중한 자산으로 여긴다. 그게 어디 보통 인연인가?”

    ▼ ‘국민 여동생’이라는 별명이 마음에 드나.

    “처음에는 싫었다. 감옥 같았다. ‘국민 여동생’은 항상 착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웠다. 특히 고등학교 때는 하지 말라는 일도 가끔은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별명이 고맙다.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국민 여동생’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그나마 지금처럼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 악플(악의적인 댓글)을 읽을 때는 어떤 기분인가.

    “처음에는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 결국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잊히더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악플에도 진짜 악의적인 악플이 있고, 나에게 유익한 악플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가끔은 그런 악플을 통해서 나를 성찰하기도 한다.”

    ▼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보니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배우가 감정표현을 다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속앓이가 길게 이어진다. 안되겠다 싶어서 나중엔 감정에 솔직하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게 이기적이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솔직한 게 낫다고 판단했다. 현대사회는 구조적으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국민 여동생에서 국민 배우로

    문근영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니 그가 이미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탐구를 오래전부터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질문이든 막힘없이 답변했는데, 그건 타고난 말재주 때문이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다독(多讀)으로 생각이 깊어진 결과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인간사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꿰뚫어보는 안목도 지녔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외할머니의 영향도 있겠지만 타고난 영민함과 꾸준한 노력 덕분일 것이다. 2005년, 환경재단 선정 ‘세상을 밝게 한 100인’으로 문근영이 뽑힌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래서 그는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팬의 폭이 넓고, 안티가 가장 적은 배우로 정평이 났다. 그의 앳된 외모 때문에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측면도 있지만, 안정된 연기와 탄탄한 실력이 무지갯빛 매력을 발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수익의 상당부분을 사회봉사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그가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다. 물질이 정신을 삼켜버린 시대에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문근영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저 나이에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케이스다. 나는 근영이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그 돈으로 남을 도우라는 어떤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다. 근영이도 기꺼이 동의했다.”

    사인회, 일일교사 체험 등 문근영의 호주 일정을 주관한 대한관광여행사 김병일 회장은 “문근영씨의 성실한 활동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우리도 마침내 저토록 진한 감동을 주는 배우를 갖게 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면서 “부디 문근영씨가 ‘국민 여동생’에서 ‘국민 배우’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시드니에서 털어놓은 ‘여인 선언’
    윤필립

    호주 Miller College of NSW(TAFE) 졸업

    한국 ‘시문학’, 호주 ‘MEAN-JIN’ 지로 등단

    2001년 WCP 문학상 수상

    저서 : 시집 ‘부끄러운 시들’(공동), ‘시드니 랩소디’, 산문집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



    문근영은 8월27일 아침 귀국길에 오르면서 “호주를 처음 방문했지만 아주 편안했다. 동생과 친척들을 만나 조용히 쉬다 가겠다는 당초의 계획은 망가졌지만,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를 익히는 학생들을 만나서 더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또 “특히 내 또래의 덩치 큰 한인동포가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의 한국어를 어린 학생들과 함께 배우는 걸 보고 감동했다. 오랫동안 그분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문근영은 공항트랩으로 들어가면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류민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왠지 조금 더 류민으로 살고 싶은 미련을 떨칠 수가 없다”면서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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