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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⑮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iykim@skku.edu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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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제거 쿠데타 계획

1951년 중반부터 야당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신 당시 총리이던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업은 1952년 4월17일 민국당, 민우회 등의 의원들이 중심이 돼 재적의원 3분의 2인 123명의 서명을 받은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이때 이들이 내심 대통령으로 염두에 둔 것은 장면이었으며, 이 방안은 미국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주한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1952년 2월15일자 전문(電文)에서 무초 대사는 차기 대통령으로는 장면이 최선이라고 썼다.

…다른 두 (대통령-필자) 후보인 이범석과 신익희는 우리가 볼 때 격이 좀 떨어진다. 최선의 두 후보는 장면과 허정인데, 그들은 추종자가 적고 좀 허약하다. 내각제를 도입하면서 이승만을 재선시키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다른 강력한 후보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승만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원치 않을 것이고,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프라이팬에서 나와 불로 뛰어드는 격’이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내각제를 운영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을 때 장면이 당선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희망이다.…미국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마도 원내에서 그가 지닌 가장 큰 강점일 것이다(FRUS 1952-1954, pp.50-51).


그러나 이 전문에서도 드러나듯이 미국은 내각제가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은 현행 제도하에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최선의 방안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내각제 개헌과 장면 추대를 동시에 꿈꾸고 있던 야당 세력과는 생각이 달랐다.

한편 이승만 대신 장면을 세우려는 움직임은 군부 일각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는 한국군 장성들을 상대로 미국측이 반(反)이승만 편임을 암시하고 다녔다. 특히 밴 플리트는 이러한 암시를 통해 한국군이 이승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군 수뇌부 일각에서 이러한 미국의 암시를 이승만 제거 쿠데타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52년 5월14일 육군본부 작전국장이던 이용문 준장이 장면 전(前) 총리의 비서실장이던 선우종원을 찾아와 ‘이종찬 참모총장도 알고 있고, 밴 플리트 장군의 묵계도 얻어두었으니’ 반이승만적인 의원들과 힘을 합쳐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 대표적 예였다.

직선제 개헌공작과 북진통일론

이러한 야당의 장면 옹립 및 내각제 개헌 시도에 대항해 이승만은 자신의 정당을 만들려는(자유당 창당) 움직임을 보이는 한편 1952년 5월14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이승만은 내각제 개헌안과 직선제 개헌안 사이의 대립을 단순히 국내 정쟁의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작게는 미국의 영향권 내에 들어간 한국 의회와 미국에 대해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한국 정부 사이의 힘겨루기로 간주했으며, 크게는 6·25전쟁의 수행방향을 둘러싼 미국 일본과 한국 사이의 갈등으로 보았다. 이 점은 그가 올리버(R. T. Oliver)에게 보낸 아래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일본인과 미국인은 모두 자기 나름의 이유 때문에 대통령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다. 국회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매수되고 압력을 받고 있다.…(일본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배상금을 받을 때까지-필자) 한일강화조약을 반대하기 때문이고, 또 한국에는 소비재 원조만 하면서 일본의 산업건설을 위해 거액의 원조자금을 제공하는 미국의 정책에 내가 반대하기 때문이다.…미국의 고위관리들은 전쟁의 목표뿐 아니라 휴전회담에 관해서도 나와의 의견차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장면은 미국이 다시 한국에 1945년과 같은 분단선을 설치하려는 타협안을 받아들일 사람이다. 만일 미국이 한반도 전체가 무력으로 재통일될 때까지 전쟁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 대신 장면 같은 인물로 대통령을 교체한다면, 그들에게는 커다란 이익이 될 것이다(R. T. Oliver, 앞의 책, pp.388-389).


전쟁정책을 둘러싼 이승만과 미국 사이의 갈등의 시작은 1950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1월 말 20여만명에 달하는 중국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미국은 전쟁에 관한 기본방침을 재검토했다. 38선 돌파로 시작된 롤백(roll-back) 정책을 밀고 나갈 것인지(확전), 냉전의 기본노선인 봉쇄(containment) 정책으로 복귀할 것인지(봉합), 아니면 한국을 포기할 것인지(철수) 를 놓고 미국은 고민했다. 미국의 최종 선택은 제한전, 즉 휴전을 통한 봉합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선회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이승만의 북진정책이었다. 북진은 롤백과는 잘 어울렸지만, 봉쇄와는 양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후 미국이 확전을 주장하던 맥아더를 해임(1951년 4월11일)하고 휴전회담을 개시(7월10일)하자, 이승만은 미국이 북진을 주장하는 자신을 제거하고 미국의 전쟁정책에 보다 순응적인 인물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닌지 몹시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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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iykim@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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