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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세종, “왕세자빈은 婦德이 중요하나 자세 또한 아름다워야…”

  • 변원림 재독(在獨) 역사학자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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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배우 윤석화씨가 왕비로 출연해 궁중 친잠례를 재현하는 광경. 친잠례는 궁궐에 쌓은 친잠단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의식이다. 이로써 풍년을 기원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왕의 대리인이자 다음 왕 지명자

17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내외법이 엄격하게 지켜져 왕비가 국가행사에 참석하거나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졌다. 그 대신 궁내에 정부 관리의 부인들을 초대해 친잠례, 양로연 등의 행사를 치렀고, 정계의 움직임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관리의 부인들과 정치를 논했다.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왕을 통해 혹은 관리의 부인들을 통해 정치적인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국가에 재난이 닥치면 왕비가 국모로서 백성의 아픔을 보듬었다. 현종 비 명성은 나라에 기근이 들어 백성이 굶는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쌀과 옷감을 해당 관서에 보내 백성을 구호하는 데 쓰도록 했으며, 순조 비 순원은 왕실 재산 중 은 1500냥을 가뭄이 든 지방으로 보냈다.

왕이 궁을 비울 경우엔 왕비가 왕 노릇을 대신했다. 고종 비 명성황후가 비밀리에 러시아로 밀사를 보낸 사실이 일본에 발각되어 살해당한 것은 왕비가 특명을 내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국가의 수장으로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명성황후처럼 직접 정치에 관여한 왕비는 드물고, 대개 왕으로 하여금 친정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도록 하여 그들을 통해 왕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왕비의 마지막 권한은 왕이 죽었을 때 다음 왕을 결정하는 것이다. 명종이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고 죽자 영의정 이준경은 “중전이 마땅히 정해야 한다”고 말했고, 중전 심씨는 덕흥군의 제3자를 왕으로 결정했다. 선조가 죽었을 때는 인목왕후가 광해군의 즉위에 반대, 왕의 인장을 시신을 모신 빈청에 두고 정부요인들에게 비밀리에 서한을 보내 영창대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왕비는 왕이 죽으면 금보(金寶·왕의 공식적인 인장)와 계자(啓字·일반 국가 서류에 왕의 결재를 알리기 위해 찍는 인장)를 갖고 있다가, 이를 다음 왕에게 전함으로써 다음 왕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왕비와 후궁의 살벌한 관계

태종 치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궁인 무작의 어머니가 병이 났으나 약을 쓸 재력이 없어 귀신에게 빌 뿐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이 무작을 불쌍히 여기고 궁중에 있던 옷감 10여 필을 내줬는데, 중궁이 궁중의 물건이라며 도로 빼앗은 것. 이는 왕비가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며 왕이라 해도 왕실 살림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왕비는 형벌로 궁인을 다스리기도 했는데, “연산비가 ‘만일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왕비가 궁궐 안살림의 전권을 쥐었다고는 하나 권세가의 딸이나 왕의 사랑을 받는 후궁들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후궁들은 비록 아무런 권한이 없었지만 왕의 사랑을 믿고, 혹은 정부의 관리들과 결탁해 왕비를 모함하거나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선조의 후궁인 인빈이 임진왜란 때 평양에 머물던 중 자신이 먹고 난 상을 대신들에게 물리자 정철이 “정철이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숙의의 퇴선을 먹겠느냐?” 하고 화를 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본래 자신이 먹고 난 상을 신하에게 물리는 건 왕과 왕비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빈 김씨가 이같이 행동한 것은 스스로 왕비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음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조 때엔 왕의 총애를 받은 소용 조씨가 왕비 장렬왕후를 별궁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궁에서 왕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인현왕후가 폐해졌다가 다시 왕비가 된 후, “갑술에 내가 다시 왕비가 되었으나 조정의 의논이 세자의 어머니라 하여 희빈을 다른 빈들과 다르게 대하고, 궁중인들이 모두 희빈을 더 중하게 여겼으며, 옛 법규에는 빈에 속한 시비가 대내 근처에는 감히 드나들지 못하는데 희빈 소속 시녀들이 항상 왕래하고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일까지 있으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금하지 못하니 한심해도 어찌하겠는가”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인현왕후전’은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궁궐에서 계속 왕비를 업신여기며 안주인 행세를 했다고 알리고 있다.

조선시대에 폐비가 8명이나 되며,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로 된 예가 7명이다. 왕비가 궁궐 내 살벌한 암투와 음모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게 생활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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