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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들이 들려준 ‘변호사 노무현’의 좌충우돌 법정 비화

판사에 반발해 자료 내던지며 퇴장… 서류 한 장도 직접 떼던 성실한 변호사

  • 이은영 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변호사들이 들려준 ‘변호사 노무현’의 좌충우돌 법정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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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들이 들려준 ‘변호사 노무현’의 좌충우돌 법정 비화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사 활동 초기 자신의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 당시에는 법정에서 감정통제를 못해 종종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이던 노 변호사는 부산 거리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1992년 5월,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에서는 부산 칠성시장 앞 도로에 앉아 최루탄이 터져도 도망가지 않고 피를 흘리며 버텨 전경들을 질리게 만들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언제부터 ‘투쟁의 변호사’로 탈바꿈하게 됐을까. 그를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지켜보았다는 김광일 변호사의 회고.

“(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 시절 제 변호사 사무실에서 3개월간 시보교육을 받았어요. 제가 지도변호사였어요. 판사생활을 1년 만에 그만두고 부산에 내려와 저한테 찾아왔어요. ‘변호사 개업을 하려는데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요. 빌려줬더니 두 달 만에 갚았어요. 그런데 개업은 했지만 사건이 별로 없었나봐요. 먹고 살아야 하니, 주로 사법서사가 하는 은행의 등기·저당 관련 사건을 맡았어요. 상고 출신이니 선후배들이 연결해줬겠지요.”

김 변호사는 “노무현은 은행의 등기사건 등을 취급하다 부림사건 무료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첫발을 내딛게 됐다”고 했다.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부산지역 학생과 재야인사 22명이 공산주의 학습을 받은 혐의로 영장도 없이 체포돼 구속된 뒤, 협박과 고문을 받고 실형이 확정된 사건이다.

“저는 부림사건에서 당사자로 지목받아 학생들을 변호할 처지가 못 됐어요. 아는 변호사들에게 부림사건 관련 학생들 변호를 요청했어요. 노무현 변호사도 그중 한 사람이었죠. 문재인(文在寅·53) 변호사도 같이 맡았는데,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일했어요. 반면 노 변호사는 처음에 ‘무료 변론을 해봐야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더라’며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열심히 했지만요.”



김 변호사는 “부림사건을 맡기면서 노무현에 대해 실망했다”고 털어놓았다. 문재인 변호사는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는 반면, 노무현 변호사는 법정에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행패를 부리듯이 변론을 해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

‘변호사 노무현’을 기억하는 부산의 원로 변호사 A씨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노무현 변호사는) 감정자제가 잘 안 되는 사람입니다. 5공 청문회 때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는 걸 보고 ‘박력 있다’고 생각했던 분이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 버릇 어디 가냐’고들 했어요. (노무현은) 변론할 때 보면 영리한 것인지, 기발한 것인지… 암튼 돈키호테적 몽상가 기질이 있는 것 같았어요. 승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요. 자기만의 논리로 끝까지 고집을 부리곤 했어요. 꼭 끝장을 봐요. 판사들은 처음엔 감정절제가 안 돼 우발적으로 나오는 행동이라고 이해했어요. 하지만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은 판사들은 생각이 바뀌었지요. 그걸 다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고 보게 된 겁니다.”

관행에 속박되지 않아

그는 ‘변호사 노무현’의 ‘기본’을 이렇게 설명했다.

“(노무현은) 독학으로 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우월의식이 아주 강했어요. 거기에 엘리트 코스를 밟지 못했기 때문인지 열등의식 같은 게 뒤섞여 있었어요. 예를 들어 판사가 대수롭지 않게 질문해도 발끈하는 편이었습니다. 원칙적인 논리를 몹시 싫어했지요.”

“말이 너무 많았다”고 회고하는 이도 적지 않다.

“(법정에선)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어요. 오죽하면 김광일 변호사가 5공 청문회 때 ‘조용히만 있으라. 딱 필요한 말만 하라’고 당부했겠어요. 노 변호사는 판사 앞에서 억지논리로 고집을 부리곤 했어요. 민주화투쟁을 하는 학생이나 노동자에겐 인기가 좋았겠지만, 엄숙함과 질서를 지켜야 하는 법정에선 그런 게 통할 리 없었지요. (판사들은) ‘바탕이 덜된 변호사’라고 수군거렸어요.”

현재 대구에서 활동하는 박태호(朴泰浩·57) 변호사는 노 대통령과 함께 판사생활을 했다. 노 대통령은 1977년 대전지법에서 1년간 판사를 지낸 후 변호사 개업을 했다. ‘판사 노무현’에 대한 박 변호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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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 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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