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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이 쓰는 이 사람의 삶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연애편지, 한 달의 동거, 딸, 그리고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사랑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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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없는 한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김종후씨(왼쪽)와 그의 스승 탄허스님. 김씨는 ‘레이디 퍼스트’가 몸에 배인, 시대의 엘리트였다.(왼쪽) 최옥분씨가 간직하고 있는 김씨의 신분증과 학생증.(오른쪽)

당시 월정사엔 젊은 승려,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일반인이 20여 명 모여 불교 경전과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있었다. 삭발에 채식하고 승복을 입은 채 새벽부터 밤까지 승려와 똑같은 생활을 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을 했다. 이름은 오대산 수련원. 월정사 조실인 탄허스님이 한국 현대불교를 이끌고나갈 지식들을 키우려고 설립한 수도원이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수도원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만다. 수도원의 열악한 재정이 첫째 이유였고 월정사 안에서 일어났던 비구승과 대처승들의 대립, 원생들과 승려간의 갈등 등도 이유가 됐으리라 짐작된다. 그 무렵 월정사는 6·25전쟁의 참화로 절 전체가 타버리는 상처를 입는다. 남아 있는 김종후의 사진에서 그가 기대선 집은 유리창이 끼워진 현대식 건물이다.

수도원의 중심과목은 화엄학이었으나 동시에 사서삼경과 노장학과 주역도 배웠다. 강의는 주로 조실인 탄허스님이 맡았고 원생들이 돌아가며 하는 순강(巡講)이란 것도 있었다. 의대생, 법대생뿐 아니라 외국유학을 다녀온 이들도 있어 수도원의 강좌는 문학 의학 법학을 비롯 영어 노어 일어 등의 외국어도 포함됐고 각자 살아온 경험을 나누는 시간엔 ‘수풍댐 건설공사의 내력’ 같은 것도 있었다. 지금 살펴봐도 불교인재 양성만이 아니라 나라 안 최고 지성을 길러내기 위한 최상의 커리큘럼인 게 확실해 보인다(김종후가 맡은 특강 제목은 ‘서구와 한국의 현대문학 개관’이었다).

월정사에서 공부하면서 김종후는 ‘자신이 곧 부처’라는 성불론(成佛論)을 자각한 것 같다. “이제 나는 희미하게나마 나의 힘, 인생의 구경목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깨닫는 데 여호아든 크리스트든 관여시킬 일이 아니다. 자력으로 해야 한다. 내가 성불했을 때 나는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멸한 여호와가 될 것이다”라고 일기에 적었고, 자신이 입산한 이유를 “사회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고 자부한다. 수도(修道)는 도리어 사회생활의 의의를 찾기 위함이다.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신념과 힘을 키우기 위한 수단이 바로 입산이다”라고 정리한다.

정신적으로 수도원 생활에 이토록 만족했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배고픔이었다. 이건 차라리 희극이다. 탄허스님은 동양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자신의 절로 모여든 젊은이 열두엇을 배불리 먹일 밥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불교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은 좋았지만 때는 전쟁 직후, 공부하겠다고 산사(山寺)에 모여든 엘리트 젊은이들에게 감자 이상을 제공할 힘이 없었다.



철학과 과학의 결합 시도

“식량이 떨어져서 아침은 죽 점심 저녁은 밥알이 보일둥 말둥 하게 감자만을 먹습니다. 감자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 주식으로 먹자니 싫증이 나는군요. 아침 죽은 굶고 점심 저녁 깡보리밥에 창자가 어떻게 뒤끓는지 영양부족에 현기증은 나날이 다해만 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태를 5년은 고사하고 단 5개월을 버티기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김종후의 이 편지는 지금 읽으면 기막히다. 게다가 그는 부잣집 도령이었다. 감자밥에는 설사를 하는 예민하고 고급한 위장을 가졌으며 매일 목욕물을 데워 목욕을 해야 하는 부르주아였다. 집에서 과자를 구워먹고 신선한 해산물을 상시로 즐기던, 당시로는 최상류의 의식주를 누리던 사람이었다. 월정사의 고단한 생활방식에 적응하기가 다른 이들보다 특별히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1928년 함경남도 청진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독립운동 때문인지 만주로 떠나셨고 어머니만 혼자 남아 큰 어장을 관리하는 집안이었다. ‘겐자쿠’라는 대형 어선을 8척 가졌는데 겐자쿠 하나에 작은 배 7∼8척이 딸리는 게 보통이었으니 청진에서 제일가는 거부였다. 넷째아들이었지만 정깊고 섬세해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청년이었다. 나남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청진 교원대학 박물과에 진학한다. 박물과는 요즘말로 하면 생물과인 모양이다.

“그 사람이 청진대학에 다닐 때는 러시아로 종마 교배 실험을 하러 가기도 했었대요. 전쟁 후에, 저와 같이 사는 동안에는 유한양행인가 하는 제약회사에서 연구원으로 남미에 가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왔었어요. 독사의 독(毒)을 이용해서 백신을 개발하는 일이라는데 날더러 어떡할까고 물어요. 위험한 일 같아서 가지 말라고 말렸지요. 그때 가라고 했으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 뉴스가 나올 때마다 그 사람이 말하던 실험실 얘기가 떠올랐어요”라고 최옥분 할머니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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