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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부산, 인천, 원산 담보로 미국 병사 20만 빌려 천하를 얻으리라”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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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이하영의 손자 이종찬 장군. 평생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해 참군인의 표상으로 존경받았다.

반민특위 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종찬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반민특위는 자진해서 습작을 거부한 이종찬의 ‘결단’에 찬사를 보내며 이종찬은 친일파의 ‘무고한’ 후손일 뿐 친일파는 아니라는 면죄부를 줬다. 한 달 후, 이종찬은 대한민국 육군대령에 임관돼 육군본부 제1국장에 보직됐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이종찬의 일본 육사 동기동창 채병덕 소장이었다.

반민특위의 조사, 육군대령 임관 등 어수선한 시기를 보내는 동안 이종찬에겐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2년간 교제해온 여인과 결혼하려 했지만 모친이 완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육군대령에 임관돼 군 최고 수뇌부에 들어갔다곤 하나 이종찬의 나이 이제 고작 서른다섯이었다. 스물두 살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줄곧 중국으로, 남태평양으로 야전을 떠돌다보니 사랑할 시간도 결혼할 시간도 없었다.

귀국한 이후 재야에서 낭인으로 떠돌던 시기 이종찬은 표자영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표자영은 분단 이후 북한에서 월남해 이종찬의 숙모가 경영하던 ‘성남 그릴’에서 회계 일을 보고 있었다. 이종찬은 의지할 데 없는 딱한 처지의 표자영을 동정했고, 동정은 이내 사랑으로 발전했다.

이종찬은 입대 후 모친에게 표자영과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모친 윤씨는 대한제국 시기 군수를 지낸 뼈대 있는 가문의 고명딸이었다. 보수적인 모친은 이종찬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했다. 표씨 가문의 지체가 이씨 가문과는 걸맞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효성이 지극한 이종찬이었지만 가문의 지체가 걸맞지 않아 결혼에 반대한다는 모친의 뜻만은 좇을 수 없었다.

반대 의사를 거두어달라고 모친을 간절하게 설득할 때마다 되돌아오는 것은 “다시는 그런 소리 입에도 담지 말라”는 호된 질책이었다. 모자간의 언쟁은 매일 같이 이어졌다. 언쟁이 잦아지자 참다못한 이종찬은 3대에 걸쳐 이어져온 집안의 묵약을 깨뜨렸다.



가문의 내력

“어머님이 지체, 지체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집안은 어떻습니까.”

분위기는 일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세상사람 모두 알고 있지만, 집안사람만큼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가문의 내력을 내뱉은 탓이었다. 이종찬의 조부 이하영이 구한말 미국공사와 일본공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낸 고관대작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씨 집안이 뼈대 있는 양반 집안이었느냐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종찬의 조부는 고관대작이었지만 그의 증조부는 경상도 동래의 구차하고 한미한 촌부에 불과했다. 이씨 집안이 지체 높은 양반 행세를 한 것은 불과 3대에 지나지 않았다. 한미한 집안 출신 이하영이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를 틈타 출세에 출세를 거듭하는 것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던 윤치호는 이하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하영씨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 거리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며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알렌 박사의 요리사로 일했다. 그런 다음 외부대신에 올랐고, 자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본래 그는 편지 한 장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양반가문 출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점잔을 빼며 처신했다. (‘윤치호 일기’, 1929년 2월28일자)


부산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던 이하영은 어떤 계기로 알렌 박사와 알게 된 것일까. 알렌 박사의 요리사는 어떻게 해서 한 나라의 외교를 좌지우지하는 외부대신에 오른 것일까. 편지 한 장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던 이하영을 조선 조정이 중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태평양 횡단선의 다섯 사내

1887년 12월10일, 영국 국적의 태평양 횡단 여객선 오셔닉(Oceanic)호가 요코하마 부두를 출발했다. 오셔닉호는 하와이를 거쳐 19일 후 태평양 건너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오셔닉호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을 이 항해는, 조선 조정에는 실로 크고도 위대한 모험이었다. 승객 대부분은 태평양을 오가며 차(茶)를 사고파는 상인이었다. 일등실 승객 중에는 동양인도 있었고 서양인도 있었지만, 단 다섯 사나이를 제외하면 모두 말끔한 양복 차림이었다. 문제의 다섯 사나이는 높고 검은 비단 모자(紗帽)를 쓰고, 가슴에 알록알록한 장식이 달린 검은 비단옷(黑團領)을 입고, 바닥에 나무를 덧댄 가죽신(靴子)을 신고 있어 복색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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