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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부산, 인천, 원산 담보로 미국 병사 20만 빌려 천하를 얻으리라”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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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외부대신 시절의 이하영.

범상치 않은 다섯 사나이는 그런 기이한 옷차림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할 기세였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차림새는 그들만 못하지만 다섯 사나이와 동행임이 분명한 승객이 이등석에 2명, 삼등석에 3명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이한 복장의 다섯 사나이와 동행한 미국인 의사 알렌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일등실 승객들에게 그들이 미국에 부임하는 초대 조선공사 일행이라고 소개했다. 다섯 사나이는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삼등서기관 이상재, 번역관 이채연, 그리고 이종찬의 조부인 이등서기관 이하영이었다.

서양인들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였지만 박정양 공사 일행은 목숨을 걸고 비장한 각오로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었다. 아니, 임금과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박정양이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된 것은 1887년 8월18일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체결로 조선과 미국은 외교관계를 맺었다. 1883년 5월 푸트(Foote)가 초대 주(駐)조선 미국공사로 한양에 부임한 이래 4년간 주조선 미국공사는 다섯 명이나 교체되었지만, 조선 정부는 주미 조선공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보낼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1882년 임오군란 이래로 조선의 종주권을 강력히 주장하는 청나라의 집요한 내정간섭과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고종이 미국과 유럽에 공사 파견을 시도할 때마다 청나라는 구구한 이유를 들어 반대했지만 본심은 하나였다.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라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것이었다. 저장성이나 산둥성이 미국으로 공사를 파견할 수 없듯, 속국인 조선 역시 미국으로 공사를 파견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청나라 역시 구미 열강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처지여서 흑심을 품고 조선으로 오겠다는 구미의 공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조선이 구미로 보내는 공사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했다. 고종이 박정양을 주미공사로 임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조선 청국공사 위안스카이가 조선 정부의 공사 파견을 반대한 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조선은 약소국이며 자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전권공사를 파견할 수 없다. 둘째, 조선은 경제적으로 빈약한 나라이기에 전권공사를 파견하더라도 재정난으로 중도에 철수할 것이다. 셋째, 조선과 미국은 교류가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전권공사를 파견해도 할 일이 없다.”

청나라는 이처럼 완강하게 공사 파견에 반대했지만 고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9월23일, 고종은 박정양을 친히 불러 유지(諭旨·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를 내렸다.

대조선국 대군주는 종이품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박정양을 전권대신으로 미국에 특파하는 바이다. 짐은 충실하고 부지런하고 총명하여 늘 가까이 두고 신임하는 경에게 명하노니 미국 수도에 주차(駐箚)하여 국서를 진정하라. 아울러 상대국에 통상교섭 일을 잘 할 것이며 우의를 돈독히 할지어다. -대조선 개국 496년 팔월 초칠일.


청나라가 조선의 미국공사 파견을 방해한다는 소식은 열강들, 특히 당사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외교 분쟁으로 비화됐다. 조선과 미국, 청의 외교적 교섭은 박정양이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된 지 석 달이 지난 11월에야 타결됐다. 청나라는 소위 ‘영약삼단(約三端)’을 이행한다는 조건으로 박정양의 미국 파견을 허락했다. 영약삼단이란 ‘첫째, 조선공사가 미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알현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외무성과 백악관을 방문한다. 둘째, 공적 행사나 사적 연회에서 조선공사는 마땅히 청국공사 다음에 입장하고 아랫자리에 앉아야 한다. 셋째, 중요한 사무는 먼저 청국공사와 협의한 후 그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 관례를 무시한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박정양 일행에게는 “짐의 뜻을 잘 헤아려 처신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영약삼단을 이행하지 말고 훗날 조선에 돌아와서는 나라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라는 말이었다.

선상의 기연

이하영은 1886년 스물아홉 나이에 외아문(外衙門)의 주사로 벼슬길에 올라 상서원 주부,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국록을 먹은 지 1년 만에 주미공사관 이등서기관이 되어 미국 땅을 밟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1884년 9월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난징(南京)호’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을 방문한 의사 알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하영은 한낱 미천한 장사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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