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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홍콩 트랩

  • 백이호 / 일러스트·이승애

홍콩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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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탈 부리는 발주처

발주처는 공기연장 협정 초안의 골격만 제시해놓고는 느긋한 자세로 일관했다. 떡 버티고 서서 우리가 초조해하는 모양을 즐기는 듯했다. 우리는 매달 뼈 빠지게 일하고 수령한 기성대금에서 상당한 부분을 지체상금으로 공제당하고 나면, 현장 운영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매번 본사에서 엄청난 자금을 지원받아야 겨우 지탱할 수 있었다. 채권단에서는 당연히 이 자금지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매번 까탈을 부렸다.

그렇다고 공사를 중단하고 현장을 폐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해결책은 공기연장 협상을 조기에 타결해 지체상금 금액을 대폭 축소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사장이 현장을 방문하고 발주처 인사들을 만나게 됐다.

2월19일 화요일. 사장이 홍콩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50분이었다. 발주처 사무소로 출발하기 전, 현장 회의실에서 지사장의 보고를 받은 사장은 매우 흥분했다. 공기연장 협상에 대한 발주처의 태도가 너무 미온적이고 고자세라는 보고 때문이었다. 그런 실정이라면 더 이상 공사를 수행해 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심지어 “내가 오늘 발주처 관계자를 만나면 더 이상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다고 포기 선언을 하겠다”고까지 했다.

오후 6시경 발주처 사무소에서 발주처 관리소장 홈즈와 발주처 대표인 크리스, 호레이와 만났다. 에디는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존이 참석했다. 우리측에서는 지사장과 내가 수행했다. 사장의 첫 발언은 거의 공사포기 선언 수준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을 짓고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가 제안한 공기연장을 안 해주면 우리로서는 더 이상 공사를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홈즈는 더 강력하게 역공세를 취했다. 안경 너머에 깊숙하게 자리잡은 파란 눈을 껌벅이지도 않고 사장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은 계약포기를 공식 선언하는 것입니까? 그에 따른 계약해지 절차를 밟아도 되겠습니까?”

사장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안색은 붉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공사포기 선언은 아닙니다. 다만 당신들이 충분히 공기연장을 해주지 않으면 공사수행이 어려워진다는 뜻입니다.”

공사포기를 선언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는 수세에 몰리고 입지는 약해지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지사장이 보완설명을 했고,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여야 우리도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전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면 우리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내려면 당신들의 현실상황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 이해를 바탕으로 적절히 공기연장을 해주어야 우리도 노력해볼 것 아닙니까.”

희미한 불빛

그러나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후에 양측에서 실무적인 대화가 계속됐지만 서로의 생각만 확인했을 뿐, 이 만남에서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발주처를 건드려 우리의 협상 입지만 더 약화된 셈이었다.

현장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끝내고 8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사장이 내부회의를 주재했는데, 낮에 보이던 강경한 태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발주처 인사들을 만난 후 그들의 강경한 분위기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이렇게 단적으로 표현했다.

“오늘 회의에서 홈즈의 자세는 매우 강경했고 전혀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발주처의 양보를 기대하지 말고 내부적으로 공기 단축 방안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현장에서는 공구장들과 수많은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내가 설득하고 윽박질러 공기단축이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공구장들이 초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했으나 계속된 의논 끝에 겨우 동의한 것이다.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발주처에서 수용할 수 있을 만한 수준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협상 성공의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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