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 2월,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던 김지하 시인이 출감하자 동료와 가족들이 무동을 태워 교도소 앞을 돌고 있다.
김 시인은 지난해 9월 인혁당 사건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의 길이 열린 것은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규정하면서다. 2005년 12월 국정원 진실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는 실재하지 않았던 단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를 근거로 법원은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고 지난해 3월 첫 재심 공판이 열렸다. 지난 1월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재판장 문용선)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8명에 대해 수사기관의 조작, 고문 등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 시인은 당시 구치소에서 인혁당 관련자인 하재완, 이수병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사건이 조작됐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하재완씨한테는 두 번 들었어요. 구치소에서 내가 위층에 있었고 하재완씨가 아래층에 있었어요. 나는 그때 하씨를 몰랐어요. 그런데 자꾸 내 이름을 부르며 통방(通房)을 시도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일이냐 물으니 인혁당 관련자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됐다’는 거예요. 그 후 구치소 복도에서 진찰받을 때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어요. 고문으로 내장이 파열됐다는 거예요. 장이 파열될 정도면 아주 심한 고문이거든요. 하재완씨 말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정치 문제니까 조금만 참아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학생들 때문에 그러니 조금만 참아라. 너희들 절대 사형 안 시킨다’고.”
그가 사건이 조작됐다고 판단한 또 하나의 근거는 이른바 공작금이었다. 당시 정보부는 인혁당이 민청학련의 상부조직이라는 유력한 근거로 공작금을 내세웠다.
“여정남씨는 하재완씨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던 사람입니다. 경북대 운동권 출신인데 이 사람이 서울대생 이철을 만나고 돌아가면서 2500원을 줬는데, 이게 공작금이라는 거예요. 조직의 상부와 하부는 자금으로 연결되잖아요. 그런데 교통비밖에 안 되는 2500원을 공작금으로 줬다는 게 말이 돼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아, 사건을 조작하려 하는구나 싶었죠.”
김 시인에 따르면 인혁당 재건위는 정보부가 만들어낸 단체지만, 민청학련은 어느 정도 실체가 있는 조직이었다.
“유인태, 이철, 서중석, 나병식, 김병곤 등이 주축이었지요. 그렇지만 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무슨 어마어마한 체계와 조직계보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전국 각 대학에서 반유신 데모를 연합해서 하자는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이었죠.”
당시 반유신 투쟁을 벌이던 민주인사들 사이에서는 대학가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주세력을 결집해 총궐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무슨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를 전복하자는 게 아니라 헌정질서를 회복하자는 게 목표였다”고 한다.
당시 가톨릭에 몸담고 있던 김 시인이 원주의 지학순 주교로부터 200여만원을 받아 조영래 변호사를 통해 대학가(서중석, 유인태)와 기독교(나병식)측에 투쟁자금으로 전달한 것도 그러한 민주세력 통합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또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도 박형규 목사를 통해 30만원이 전달됐다.
정보부에 잡혀 들어간 김 시인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조사받은 지 닷새째 되는 날 민청학련을 인혁당과 연결하려는 정보부의 공작을 간파하고 이를 저지할 속셈으로 가톨릭측으로부터 돈 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당시 정보부는 인혁당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면서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여정남을 이철과 유인태에게 공작금(2500원)을 줬다는 이유로 하재완과 더불어 인혁당 재건위 조직원으로 규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가톨릭 돈을 받아 학생들에게 투쟁자금으로 전달했다는 김 시인의 진술이 나오자 정보부는 부득이 수사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윤보선 전 대통령 등 종교계와 정계 인사가 민청학련의 상부선(上部線)이 됐고, 인혁당의 역할은 중간에 개입한 정도로 축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