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여주시 영릉에 있는 세종의 어진.
“모든 집안을 대상으로 하라”는 이 말에는 기실 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언뜻 보기에 한미한 집안의 규수도 빼놓지 말라는 것으로 들리지만, 동시에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여식도 아울러 대상에 넣으라는 말이었다. “경들의 인척이나 혹은 친지 중에 서로 찾아보도록 하라”(24/1/3)는 나의 말뜻을 영민한 이만수가 모를 리 없었다.
사실 그동안 노론은 국혼의 대상을 자기 세력 중에서 찾되, 되도록 세력이 미약한 집안에서 왕비가 선발되게 했었다. 강력한 가문이 외척이라는 칼자루까지 쥐게 되면 자칫 노론 전체가 요동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묵계였다. 앞의 서종제나 홍봉한, 그리고 김시묵의 가문이 선발된 예가 바로 그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예판 이만수는 나의 이 뜻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올린 명단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행호군(行護軍) 김조순의 딸, 진사 서기수의 딸, 유학 박종만의 딸, 유학 신집의 딸, 통덕랑 윤수만의 딸이 1차와 2차의 간택을 통과했다(24/2/26). 단연 1순위로 올라온 김조순의 여식에게 관심이 쏠렸다. 아! 김조순의 집안이 어떤 가문인가. 김상헌 이래 전통에 빛나는 안동김문(金門)의 규수가 최종 5배수에까지 오른 것은 과거의 규칙대로라면 불가능했다. ‘중매’라는 방식과 책임자의 변경 등 고심 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래도 조정 대신들의 의구심을 흩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그들이 국혼물실의 당론을 위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 김조순 가문에 대해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이만수 옆에 앉은 예조참판 이노춘을 의식하며 던진 말이다.
채제공을 탄핵하다 유배를 갔고, 지난해에야 겨우 풀려난 이노춘의 의심 어린 눈빛이 매서웠다. “그런데 지난달 현륭원 참배를 하던 날 밤 꿈이 무척 좋았다. 마치 나더러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만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꿈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국복(國卜, 국가지정 점술가) 김해담이 거들었다. “기유년 5월15일 유시(酉時)면, 대길대귀의 격으로, 복록도 끝이 없고 백자천손을 둘 사주(四柱)입니다.” 김조순의 딸 얘기다. 늘 그렇듯 점쟁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내 마음을 훤히 읽고 있지 않은가. “오늘 간택 때 보니 김조순의 여식이 얼굴에 복이 가득하고 행동거지도 뛰어나 자전과 자궁도 한번 보시고 첫눈에 좋아하셨다.” 자전까지 좋아하셨다고 하자, 이병모와 이노춘도 마지못해 말했다. “지금 성상의 하교를 듣고보니 참으로 종묘사직을 위해 끝없는 복이라 하겠습니다.”(24/2/26).
문제는 나의 건강이었다. 근력이 날이 갈수록 쇠퇴해갔다. 요즘에는 버티고 서 있기조차 힘들어졌다. 먹는 것과 자는 일이 제대로 안 되니 정신까지 왔다갔다해 책 읽는 것도 힘들다. “신도 어제 그렇게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고 대단히 염려스러웠습니다.” 원릉(元陵, 영조의 능)에 가서 예를 올릴 때 휘청거리던 나를 본 이병모의 말이다. “내가 즉위한 지 20여 년이 흘렀는데, 신하들과 만나고 대화 나누는 것을 이렇게 못하기는 처음이다. 이제는 부득이 휴양을 위주로 해야겠다.”(24/2/27).
정말로 휴양이 필요한 때다. 그동안 그야말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통 국사에 매달려온 날이 몇 해던가. 올해 들어서만도 “옷을 입은 채로 밤을 지새우길” 벌써 25일째다(24/1/25). 그러다보니 체력이나 정신력이 모두 엉망이었다.
50발의 화살을 쏘아도 끄떡없던 내가 체력의 한계를 느낀 것은 몇 해 전부터였다. 특히 지난해 7월부터는 시력이 매우 나빠져 안경을 쓰지 않으면 글씨를 읽을 수가 없다. 복잡한 일을 만나면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올라오곤 한다(23/7/10). 지난해 가을의 현륭원 행차 때에는 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