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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20

국가폭력과 개발주의의 극치, 유신체제의 비극적 종언

  • 김세중 연세대 교수·정치학 ksjmoon@unitel.co.kr

국가폭력과 개발주의의 극치, 유신체제의 비극적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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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지와 3선 개헌

유신체제는 한국이 민주공화국임을 표방하며 출범한 이후 일찍이 경험하리라고 상상하기 힘들었던 이질적 체제였다. 선진국 표준에 맞춘 민주공화국헌법을 준거 틀로 출범한 한국은 건국 이후 역사적 경험 부재, 사회 경제적 여건 미비, 분단과 전쟁이 빚은 남북간 첨예한 긴장, 이에 따른 국가강제력 기구의 과도한 팽창과 시민사회의 위축 등에 따른 체제적 차원의 제약에, 지도자의 권위주의적 성격 등이 걸림돌이 돼 왜곡된 형태의 민주주의 정치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적어도 제도적 차원에서는 민주주의 기본원리가 5·16 이후의 군정기간을 제외하고는 부정된 적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과 3권 분리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사실상 정면에서 부정한 유신체제의 등장은 경천동지의 정치적 격변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정치적 격변의 배경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중 하나는 박정희의 권력의지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다. 이는 유신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사실상 박정희 1인의 독재적 장기집권을 허용하는 것이라 볼 때 자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의지 없이 권력을 연장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모순된 현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박정희가 어린 시절 인류역사상 몇 안 되는, 무한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인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같은 인물을 숭배했다는 사실, 그 후 김종필 등 그의 여러 측근의 증언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유난히 강한 권력의지를 지녔던 인물이라는 점에 비추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이에 덧붙여 박정희의 권력유지와 관련된 당시의 정황도 이 설명에 신뢰성을 더해준다.

유신체제가 도입된 1972년 10월은 박정희가 이미 1969년에 3선(選) 개헌을 강행해 임기를 한 차례 연장해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1년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박정희가 3선 개헌 당시 기존 헌정질서의 틀 속에서 개헌이라는 적법절차를 통해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국회에서 여당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1972년에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국회에서 단순 과반 의석밖에 점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 아래 박정희가 헌정질서의 틀 속에서 합법적 개헌절차를 통해 집권연장을 시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가 권력의지를 접지 않는 한 유신 쿠데타적 방법을 통한 집권연장시도는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임기가 2년여 남은 시기에 체제 대전환을 모색한 것은 임기 말 권력 누수(漏水) 가능성을 고려한 조치라고도 볼 수 있다.

이상의 고찰은 강력한 권력욕에 의해 촉발된 박정희의 결단이 유신체제 도입의 일차적 또는 직접적 요인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통치자의 주관적 결단이 실천 가능한 것이 되려면 그것을 추진할 만한 상황 장악력, 그리고 정치적 기반의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 따라서 유신체제 수립을 박정희의 권력의지의 표현으로 설명할 경우에도 그것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정희의 집권 이후 그를 둘러싼 권력구조의 변화과정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민정(民政) 이후 박정희는 집권당 내부에서 그의 후계를 노리던 두 세력의 시도를 무산시키며 독점적 위상을 구축한다.

중앙정보부 장악과 권력집중화

후계를 노리던 한 세력은 김종필계였다. 육사 8기생들은 박정희의 최측근에서 5·16을 기획하고 추동하는 주도적 구실을 하는데 김종필은 이 집단의 대표로서 5·16세력의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5·16 직후 그는 혁명정부의 가장 중요한 권력기반인 중앙정보부 창설을 주도했고, 또한 초대 부장으로서 정보부의 조직과 정보망을 이용해 혁명주체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인 민주공화당 창당을 이끌었다.

이에 따라 공화당에는 그와 정서적, 이념적으로 친근한 사람이 다수 영입돼 당의 주류를 형성했다. 집권당 내에 확보된 지지기반을 배경으로 젊은 정치인의 신선한 이미지와 독특한 언변으로 무시할 수 없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한 김종필은 나름대로 권력의 축을 형성하고 후계자로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3년 총선 당시 영입한 김성곤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권 구(舊)정치인그룹과 5·16 주도세력 일부를 엮어 김종필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당에 포진시킨다. 이들은 이후 김종필의 권력승계구상을 결정적으로 무산시킨 박정희의 3선 개헌작업에 앞장서게 된다. 애초 3선 개헌 시도에 저항하던 김종필계는 박정희의 집요한 설득으로 김종필마저 3선 개헌 지지로 돌아섬에 따라 와해되고 만다.

3선 개헌 이후 당내 위상을 확고하게 굳힌 김성곤 등 신주류는 박정희의 세 번째 임기가 마무리되는 1975년 이후를 대비해 이른바 2원집정제를 대안으로 권력중추를 장악할 것을 구상한다. 이들 세력의 대표인 김성곤은 막강한 재력과 호방한 성격으로 여권은 물론 야권, 언론, 재계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한 거물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마저 1971년 10월2일 국회표결에서 벌어진 이른바 ‘항명(抗命)사건’을 빌미로 당과 국회에서 추방됨에 따라 집권세력 내부에는 박정희의 권력의지에 제동을 걸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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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중 연세대 교수·정치학 ksjmoon@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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