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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의 국제정치학

우파 핵심 아베, 장기 집권 노려 ‘국제 왕따’ 감수

  •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정치학 khyang@mail.skhu.ac.kr

일본군 위안부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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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에 당황한 아베 총리는 3월26일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해 총리로서 사죄한다고 일단 표명했다. 그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묻는 질문에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만 답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베 총리의 측근인 시모무라 관방 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의 관여가 없었다”며 재차 강제성을 부인했다. 그는 종군간호부나 종군기자는 있었지만 위안부는 없었으며, 가난한 부모가 딸을 판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안부 문제의 최대 쟁점은 강제성 여부다. 피해자의 뜻에 반해서 당국과 일본군이 조직적인 강제연행을 했는지, 민간업자가 피해자 부모에게 돈을 주거나 당사자에게 공장취업이라고 속이고 연행한 것인지, 위안소 설치와 시설 내 생활이 강제적이었는지 등이 그 내용이다.

피해자 숫자에도 차이가 크다. 위안부 문제의 1인자로 평가받는 요시미 요시아 기주오(中央)대 교수는 피해자를 최소 5만명에서 많게는 20만명으로 추정한다. 반면 우익 역사학자인 하타 이쿠히코 전 니혼(日本)대 교수는 위안부가 약 2만명이었으며 그중 일본인이 40%, 조선인이 20%, 중국인이 10%였고 나머지 30%는 현지에서 모집했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부가 ‘종군위안부’가 아닌 ‘일본군 위안부’라고 표현하는 것은 위안소 생활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적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동안 미국에서 공개된 공문서, 피해자의 생생한 진술과 사진, 일본군 개입을 입증한 문서들을 강제성의 증거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도 1977년 일본 헌병 출신인 요시다 세이지가 일본군이 조선에서 젊은 여성을 강제 연행해 위안부로 삼았다고 증언했고, 1983년에 쓴 책에서 자신이 제주도에서 일본군의 협력을 받아 일주일 만에 205명의 여성을 연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줄곧 위안부 모집이 민간업체가 한 일이라고 발뺌해왔으나, 1992년 1월 방위청 자료실에서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에 개입한 사실을 입증하는 문서가 확인되자 이듬해 8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일본 정부의 개입을 시인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 이것이 ‘고노 담화’다. 발표 당사자인 고노 현 중의원 의장은 2006년 11월 아시아여성기금 인터뷰에서 위안부 모집에 정부가 직접 관여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징집을 명령한 구(舊)일본군 자료는 은폐 처분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 관헌이 위안부 모집에 관여했다는 점은 피해자 진술로 뒷받침되며, 당시 조사한 16명 이상의 위안부 진술은 사실로 인정된다고 말한 바 있다. 고노 의장은 1993년의 고노 담화가 신념을 갖고 한 것이며, 이제 와서 취소할 뜻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의원모임’의 억지 주장

우파 정치인들의 ‘의원모임’은 위안소 설치에 관한 일본군 개입은 인정하되, 끌려온 정황에 대해서는 16명의 피해자 진술 외에 밝혀진 것이 없다며 강제성을 부인한다. 또한 고노 담화는 당시 한일 양국의 민간단체가 격렬하게 항의를 벌여서 정치적 판단으로 강제성을 인정해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당시 미야자와 총리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한국측에서 강제연행을 담화 문건에 삽입하면 나중에 문제 삼지 않겠다는 요구를 해왔고, 악화된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본이 이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안소 설치 외에 위안부 모집과 운영은 민간업자의 책임 아래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당시엔 공창(公娼) 제도가 있었으며 민간업자가 여성들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 점은 있으나, 군대나 정부가 강제 연행한 사실은 없었다고 본다. 단 1건 자바섬에서 일본군이 현지 여성을 강제 연행한 ‘수라만 사건’이 있었지만, 범죄를 저지른 군인은 즉시 처벌받았으며 이것은 오히려 강제연행이 이례적인 일임을 시사한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수년전 사설에서 “전시근로에 동원된 여자정신대를 위안부 사냥을 위한 제도처럼 캠페인하고 있는 일부 매스컴의 역사 날조는 자학(自虐)사관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독일도 전쟁 당시 점령지에서 장병 위안용으로 국가가 ‘여성사냥’을 했다며,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이 워낙 거대악(惡)이어서 위안부 문제는 불문에 부쳐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견된 각종 자료와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가 명백한 강제연행이었음을 입증한다. 1945년 중국 쿤밍에서 일본인과 한국인 포로를 조사한 미 육군 조사보고서는 싱가포르에 있는 일본 공장의 여직공을 뽑는다는 신문광고에 속아 수백명의 소녀가 끌려왔다고 밝혔으며, 최근 공개된 미 국립문서보관소 기밀보고서에서도 강제연행이 확인된 바 있다. 국제법에 비춰봐도 1925년 일본은 취업협정, 조약, 부녀자 매매금지 조약에 서명하고 1932년 ILO(국제노동기구) 29호 강제노동조약에 가입했다. 위안부는 말할 것도 없고 공창제 자체가 이미 조약 위반인 것이다. 외견상 당사자와 자유의사 계약형태를 취했더라도 채무로 인한 구속과 감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국 산둥성에서 기관총 사수로 복무한 가네코 야스기는 3월10일 ‘TV도쿄’ 인터뷰에서 동료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을 납치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위안부가 매우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강제성이 없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일본 정부가 하루 빨리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쓰치야 고켄 전 일본변호사협회장도 4월10일 “민간업자가 아닌 군대가 위안부를 직접 납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아베 총리의 발언을 정면 부인했다. 그는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강제라는 용어가 없다고 해서 강제성을 부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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